적막
비가 온다. 보통 같으면 오늘 같은 주말, 집 앞 주차장에 관광버스 몇 대 서고 시끄럽기 그지없는 소란이 이어질 텐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문자 그대로 완벽한 적막. 현관에 앉아 바라본다. 몇 그루 옥수수. 지난여름 끝나갈 무렵, 싱싱한 옥수수 맛이 하도 좋아, 2년 전에 남겨 놓았던 옥수수 몇 알 심어놓은 곳. 자라기는 자랐다. 하지만 옥수수 영글기 바로 전 여름 끝. 이제 잎이 다 떨어진 저 녀석들 어디서 에너지 얻어 마지막 단계를 마무리 지을 것인가. 불쌍하다. 달리기 결승라인이 눈앞에 보이는데, 이제 기운이 다해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는 그런 형국. 삶이란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Douglas Hofstadter의 ‘Gödel, Escher, Bach: An Eternal Golden Braid’를 읽고 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생소한 분야 책들엔 그 쏟아지는 단어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또 그냥 소설처럼 읽어나갈 수 있는 그런 책도 아니다. 중간 중간에 능동적 참여를 많이 요구하는 ‘생각놀이’라, 아마도 오랫동안 잡고 있어야 할 모양이다. 어제 저녁 때 간단히 차려 먹고 있는데, 그 때 들어온 마눌님 코멘트 “점심이야, 저녁이야” 이것도 질문인가? 내 점심을 먹었는지 걸렀는지.(하긴, 나도 모른다.) 또 지금 앞에 놓인 것이 냉장고에서 며칠 전 재료 끄집어내 불에 올렸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사흘 동안, 같은 냄새, 같은 맛) 그나마, 오늘은 변화, 점심 상에 놓인 것은 스팸 몇 조각. 사는 게 무엇인지. 서래마을 같으면 그냥 후딱 나가 타코스나 햄버거 가게라도 들릴 수 있을 텐데, 여긴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이렇게 불만인 것 감 잡았는지, 방금 다가와 하는 말, 냉장고에 불고기 무쳐놓은 것 있으니 해 먹으란다. 지는 먼저 끝냈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구한 날 책이나 펴고 집에 죽치고 앉아있는 또 한 사람을 챙겨야한다는 것, 입장 바꿔 생각하면 정말 못할 짓이지. 남녀의 역할 구분. 이건 남자들이 바깥세상에 나가 싸울 때, 그때 적용되는 이론 아닌가. 더구나, 이제 내일로 다가온 연주회. 어디 마음 여유가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제 내일이 지나면, ‘내’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인데, 그땐 뭘 하지? 이제 ‘나 가수’ 볼 시간이다. 내 보는 유일한 프로그램. 서바이벌 그 잔혹함. 자존심, 자부심, 그런 것 아무 의미 없다. 오직 ‘웬수’같은 평가단과 경쟁자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가수들, 우리 삶의 대표주자 같아 고귀해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