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앞산

뚝틀이 2012. 8. 19. 21:53

어제 개운치 않은 맛을 남기며 그냥 내려온 앞산. 가끔 구름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이끌려 다시 오른다. 오늘은 위험한 코스를 피해 과수원 옆을 통해 계곡으로 내려선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앞산에 오르기 위해선 계곡을 넘어서야하니 어쩔 수 없다. 계곡이라기보다는 협곡. 가파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하긴 이렇게 험한 곳이라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조용하니 이곳 사는 나에겐 다행인 셈이다.

오르고 오르다 힘들어 쉬며 건너편을 바라다보니 아직 우리집보다 낮은 위치다. 원위치, 원래의 높이에 도달하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가.

좀 더 오르니 며느리밥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슨 이유일까. 이 꽃을 볼 때마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한쪽엔 이빨까지 반이 물들었다. 새며느리쪽으로 가려는 것일까? 

 

 

 

올라도 올라도 계속 며느리밥풀뿐이다.

끊임없는 오르막길, 도대체 안부가 없다. 경사도 45도가 아니라 60도 정도. 그래도 짙은 숲에 햇볕이 가려지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삽주가 보이기 시작한다. 예년과 달리 참 자주 참 많이도 나타난다. 금년 이상기후가 이 녀석들에게는 오히려 더 알맞은 조건이었나?

하긴, 異常이란 무엇인가. 다수에게 이상한 그것을 바로 기회로 삼는 그런 존재들도 있는 법. 세상살이란 게 뭐 그런 것 아니던가.

 

 

구절초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어린 싹들뿐.  이들이 피려면 아직 멀었다.

그렇다. 이제야 생각이 난다. 여기 이 산 구절초는 추석 무렵 송이가 한창일 때 그때야 만개한다는 것이.

가을꽃은 높은 산에서부터 피기 시작한다. 봄부터 시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추위가 오는 때로부터 역으로 계산(물론 여름이 수그러들며 보내는 위험신호를 알아차리는 그 '계산'이란 것엔 수많은 희생이 들어있었던 것이고)해서 피기 시작하는 것. 그래서 그제 갔던 소백산 그 높은 곳 구절초는 이미 피기 시작했고, 그곳보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더 있는 이 산 꽃들은 아직 그렇게 급할 것이 없고.

 

참취들도 눈에 띈다. 숲속을 밝혀주는 별과 같은 존재들. 특별히 예쁠 것 없고 귀여울 것 없는 꽃이지만, 나에겐 웬일인지 반갑기 그지없다. 

 

은분취도 눈에 띈다. 이 녀석들 또한 예년보다 많아 보인다. 화려한 가위손 듬뿍 담고 뽐내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도라지. 몇 년 전만해도 이 산에 도라지가 참 많았었는데, 그것 알게 된 사람들 참 알뜰히도 뽑아갔다. 잎이 맛있는 나물이라면 그래도 얼마만큼이라도 남아있을 수 있었겠지만, 뿌리가 소용인 이 불쌍한 존재들. 언젠가 사람들 시간수당이라는 것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지는 그런 날을 기대해본다. 그냥 밭에서 키운 도라지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날이 오기를. 

 

목적지 군락지까지 올라왔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모양. 몽우리 맺힌 몇 송이만 눈에 띌 뿐, 꽃을 피운 녀석은 하나도 없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다시 아래로 향한다.

오르기 힘들었던 길일수록, 내려가기엔 더 위험이 따른다. 조심 조심 또 조심. 

 

오른다는 것. 가파른 길을 오른다는 것. 그건 힘든 일이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시야가 좁아진다. 삶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목표를 향해 매진하던 그때. 그땐 오직 위만 볼 뿐이다. 원하는 것 그것만을 찾을 뿐이다.

오늘의 목적은 구절초를 보는 것, 그렇다면 나의 오늘은 실패인가? 

천만에, 이렇게 숲속을 '기어오르는 것' 그것 또한 즐거움이었다. 목표라는 그 무엇인가 머릿속에 있었기에 있었던 즐거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은 헛것?

그럴 리야. 저기 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 경치 이것 역시 멋있지 않은가. (아까 청풍호가 내려다보이는 거기에서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곳저곳 제멋대로 돌아다니곤 하던 뚝틀이, 오늘은 잠깐씩 자리를 뜨기는 하지만 그건 주변 경계 목적일 뿐, 충실히 옆을 지킨다.

마음에 여유가 돌아오니, 숲 속 저 안쪽에 있는 꽃들도 눈에 들어온다.

원추리는 낮은 자세로 나무 밑에 숨어있고, 모시대도 그늘 밑에서 쉬고 있다. 

 

 

솔체, 내 야생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솔체라는 꽃을 처음 본 곳도 바로 이곳 아니던가.

 

몇 번 넘어지며 카메라까지 부쉈던 그 지점도 통과해 무사히 계곡에 안착.

그동안 무척이나 목이 탔었는지 뚝틀이 그냥 물속으로 달려든다.

탈진.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 정도라고 몸이 사정한다. 쉬어가자고. 그러지 뭐.

과수원 아저씨가 들려주는 복숭아를 입에 문다.

과일이라는 것. 고체형태의 달콤한 물. 아이스크림처럼 입속으로 녹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