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사냥
현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저울질 한다. 지금 나서면 빗방울 떨어지기 전에 몇 장 찍을 수 있을까? 세잎꿩의비름, 오늘은 어떨까. 어제 그 빗물에 짓뭉개져있던 서덜취, 지금쯤은 꽃잎이 좀 말라 펴졌을까? 저쪽 산엔 이미 비 시작이다. 이쪽 산으로도 퍼져오는 모습이 보인다. 계산은 점점 더 급해진다. 지금이라도 그냥 무조건 나서? 아서라, 아서. 쉬자, 쉬어. 평소엔 팔꿈치에 받쳐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어제는 계속 손에 들고 다녔더니 오늘 손목 통증이 보통이 아니다. 의사를 찾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괴롭다. 마침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래, 오늘은 쉬지. 책이나 읽지 뭐. 바쁘다, 바빠. 직장생활 못지않게 참 바쁘다. 날 맑으면 산으로, 비오면 집에서 책, 차에 앉으면 꽂아놓은 CD에 귀 기울이고, 거기에 또 구름 없는 밤 기다렸다 들마루에 누워 하늘의 별들 쌍안경으로 찾아 나서고.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이런 일만 골라하는 나, 내 지금 이렇게 무위도식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젊었을 때 무슨 보람 있는 역할을 하긴 했었던 것일까? 야생화 사냥, 참 중독성이 강한 취미다. 쉬는데도 마음 다스림이 필요한 그 정도다. 다른 취미도 그랬었나? 바둑도 음악도 어느 정도 그랬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맞다, 맞아. 한 때 골프가 그랬지만 그건 2불 4불 그 정도밖에 안 하는 퍼블릭 코스가 집 근처에 있었던 그런 특수 환경 덕분이었고. 햇수로는 올해로 다섯 번째. 초기에는 높은 산에 올라가야 야생화라는 것이 있는 줄 알고 소백산 치악산을 참 많이도 오르내렸다. 그 사이 ‘각오’와 ‘인내’ 뭐 그런 식의 개념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등산의 개념이 ‘희망’과 ‘희열’로 변해갔고, 그래서 그전엔 중간에 포기하곤 했던 월악산 영봉도 또 설악산 대청봉도 자연스레 몇 차례 오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참 행운이다. 당시 그냥 하염없이 무너져가기만 하던 몸과 마음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꽃 사냥 덕분이었으니.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무리한 산행에 때로는 다치기도 하고 무릎에 무리가 오는 것 역시 다반사였느니. 야생화 사냥 중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사진’. 학생시절에도 사진이라는 것을 배워 볼 시도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물론 시간을 내기도 힘들었다는 그런 상황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을 뽑는 그 비용이 너무 부담되어서, 결국 그 필름 카메라는 그냥 먼지만 뒤집어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카메라에는 소위 이런 ‘유지비’라는 것이 필요 없으니 그저 왔노라 봤노라 찍었노라 그거면 된다. 시간이 지나며, 꽃술을 좀 더 선명하게 풀 모양을 더 싱싱하게 표현하는 기법도 배워나가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찍는 꽃 주변 상황까지 어떻게 표현해볼 수는 없을까 하는 식의 욕심도 키워간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정리한 목록을 보니 그 동안 찍은 꽃이 이미 800종을 넘어섰다. 이 새 꽃 만나기란 ‘넓이작업’이 꽃 구분하기란 ‘깊이작업’으로 그 성격의 중심축이 옮겨가고 있는 이 단계에서 아픔을 느낀다. 잎과 줄기의 특징이 잡혀있는 사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 산형과에 대해선 그렇게 신경을 썼건만 사진을 보면 허점투성이고, 또 며느리밥풀 식구들 갈라내기도 쉽지 않고, 초오속에선 아예 난감 그 자체다. 학구적 분위기가 결여된 미적표현 추구가 허구라는 진실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하긴 어떤 분야라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과 이야기는 모두 나 쪽의 이야기. 정말 정말 경이는 각 야생화들이 사는 모습 자신을 가꾸는 모습 이 세상 어떤 교훈보다도 더 강렬한 그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