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계곡
태풍, 예보로는 우리 이쪽을 지난다고 해서 무척 불안했다. 엄청난 바람. 하지만 막상 지날 땐 조용하다. 예보보다는 더 아래쪽을 지나게 되어 여기는 중심에서 왼쪽. 반시계 방향으로 치는 소용돌이와 진행 속도가 상쇄되어 일어나는 현상. 어쨌든 이 태풍이 동해안으로 빠져나가고 우리 집엔 별 피해가 없고(이번 여행 다녀와서야 알았다. 2층 대형 유리창이 파손된 것을), 잠은 오지 않고, 이럴 바에야 그냥 설악산으로. 야간 운전. 날이 갈수록 잘 보이지도 않고 밤 운전이 힘들다. 날이 밝아질 때 장수대에 도착하니 입산 금지. 흘림골도 마찬가지. 온 길로 다시 돌아와 화진포 쪽으로. 곳곳에 도로공사로 길이 막혀 우회 또 우회. 언제나 마찬가지. 감흥을 느낄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서 그럴까, 전혀 뭐 아름답다 멋있다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다. 바닷가 하염없이 내려다보다 옆에 보이는 동산에 올랐다 그냥 남쪽으로 향한다. 중간에 얼마 전 각시수련 찍은 곳이 나타나 그곳 한 번 들려보려다 옆 공사장에서 흘러내려온 모래흙 진흙에 완전 봉변당하고, 다시 차에 올라 자생식물원으로. 작디작은 꽃을 귀한 꽃이라 생각하고 온갖 정성 다해 수없이 찍었는데, 쥐깨풀. 해변에 있는 횟집에 들려 빈속이나 달랠까 해봤지만, 영 어디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냥 간단히 짬뽕 한 그릇 그것으로. 그래도 바닷가 집이라 그런지 내용물은 싱싱해 좋았다. 이제 날도 저물었고 켄싱턴으로. 밤잠을 거른 탓인지 피곤이 몰려온다. 엄청난 피곤. 다음 날 아침. 컨디션이 어디 산에 오를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저 나이에 걸맞게 케이블카 타고 권금성에나 오를까 했지만, 거기도 무슨 공사 중이라 그냥 내렸다 다시 내려와야 한단다. 그럴 마음은 없다. 발걸음을 옮긴다. 비선대까지 산책이야 나쁠 것 없지. 날이 맑다. 참 맑다. 거의 가을하늘 수준이다. 매점에 들려 도토리묵 하나. 언제부터 이걸 좋아했는지 그 기억은 안 나지만, 참 좋다. 더구나 싱싱한 참나물.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더 오르지 뭐. 이 코스엔 꽃이 별로 없다는 것 그건 경험으로 잘 안다. 오늘은 오랜만에 꽃 그런 것 상관없이 편한 마음 등반 그런 생각. 계곡 물 소리가 참 좋다. 이쪽 코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중간 중간에 구절초도 보이고 과남풀도 눈에 띈다. 산책로 내내 오리방풀 밭이다. 특히 양폭대피소 근처에 있는 녀석들은 빛의 방향이 맞아떨어져서 그런지 신비할 정도로 선명한 빛이다. 마음에 오르다보니 천당폭포.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오련폭포까지는... 물 먹은 바위마다 싱싱한 바위떡풀들이 유혹한다. 빛, 빛이 있다면. 조금만이라도 빛이 들어온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희운각대피소까지 가볼까 생각하다가 우거진 숲에 그늘만 계속되니 더 이상 오를 흥이 나지 않는다. 내년 쯤 한 번 희운각에서 1박하고 여기서 공룡능선을 타볼 생각이다. 이제 그만. 하긴 지금 내려가도 날이 어두워서야 아래에 도착할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아래로 발길을 돌리는데 뭔가 허전하다. 대청봉에 오르는 그런 식 등반이 습관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뭐 정신이 번쩍 나는 무슨 신기한 꽃을 찍지 못해서일까. 왜 이렇게 멀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하산할 때마다 느끼는 것, 내 언제 이렇게 많이 올라왔지? 사실 산에 오를 땐 그런 것 느끼지 못한다. 목표라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감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이루었다' 그것뿐. 또 하나 있다. 올라갈 때는 근육의 힘이 요구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한다. 긴장의 연속. (그런데 사실 오늘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저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올랐다.) 내려가는 것은 고역. 중력의 법칙을 무릎이 다 받쳐줘야 하니. 조금만 방심해도 또 발목이 위험해지고. 카메라 다 접어 배낭에 집어넣고 지팡이 꺼내들고 내려오는데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호텔 주차장에 돌아오니 완전 녹초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어디서 요기라도. 산행할 때마다 불편한 것 하나, 점심을 거른다는 것. 아침이 좀 늦었다. 늦은 시간이 아니라, 새벽에 떠날까 망설이다 다시 잠이 드는 바람에 계획과는 달리 호텔에서 아침. 덕산기 계곡으로. 비가 온 탓인지 물이 많이 불었다. 어디 ’싱싱한‘ 물매화 있나 찾아보지만, 물가에 있는 녀석들 흙탕물 뒤집에 쓰는 고역에서 아직 풀려나지 못한 탓에 마음에 드는 모델이 별로 없다.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별로 흥이 나지도 않고. 더 이상 늦어지기 전에 대덕사로. 이미 너무 늦었다. 세 시가 지났으니. 집으로. 내비게이션 이 녀석 맛이 갔는지 엉뚱한 곳으로 또 더 엉뚱한 곳으로. 하긴 정신 줄 놓고 그냥 시키는대로 따라한 내 잘못이 더욱 크지만....참 뭔가 좀 먹어야할 텐데. 오늘도 7시에 아침 그 후로 빈 속이다. 몽골식 양고기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래? 들어가는 1인분은 안 된단다. 그럼 2인분 시키면 되지, 마침 양을 잡으러 갔단다. 이런.... 2박3일의 나들이, 그냥 그렇고 그랬던 김빠진 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