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 2012. 10. 4. 17:38

앞산을 오른다. 몇 해 전인가 저 안쪽 계곡으로 돌아가 그곳으로부터 올라 이쪽으로 내려온 적이 한 번 있을 뿐 그 후론 그냥 보고만 있었던 봉우리 혹 저기도 무슨 꽃이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한 번 올라봐야지 마음먹고 있었던 봉우리다. 길을 벗어나 산에 들어서자마자 숨고르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가파른 경사가 시작된다. 간단히 방향잡고 위로 향할 수 있는 그런 곳도 아니다. 도대체 길다운 길 아니 길이라고 짐작할만한 곳이 없다. 몇 번씩이나 발걸음을 뒤로 돌려 다시 두리번거리며 오를 수 있는 곳을 찾아본다. 오늘 오르기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큰 나무 사이로 자라나는 작은 나무들 하필이면 그 가지들이 딱 사람높이로 배낭을 뜯고 얼굴을 때리곤 한다. 거기에 또 간벌 후 널려져있는 덩치들, 넘어가고 돌아가고 정말 고역이다. 꼭 올라야하나? 무슨 꽃이라도 있을까 하는 희망은 일찌감치 접었다. 이런 지형 이런 숲 속 이런 방향은 야생초들이 끼어들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못된다. 지금이라도 다시 내려가 옆 봉우리로 오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거긴 지금 삽주랑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었을 텐데. 아니지. 그렇게 여기를 올려다보곤 했는데. 다시 오를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올라봐야지. 그래도 너무 힘들다. 경사도 점점 더 급해진다. 아래쪽이 40도 정도였다면 이제 60도는 족히 될 것 같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렌즈배낭 무게에 몸이 뒤로 넘어갈 듯 휘청거린다. 뚝뚝 떨어지는 땀. 전에 쓰던 모자는 이마와 머리에서 나는 땀 잘 모아 채양 앞쪽 끝으로 흘러내리게 하였는데 새로 산 이 모자는 같은 회사 비슷한 제품인데도 그런 기능이 훨씬 떨어진다. 너무 헐고 뜯어졌지만 그 모자 차마 버릴 수 없는 이유다. 그 모자 빨래 통에 들어간 오늘은 할 수 없이 이 모자. 정말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다. 정상까지 남은 길이 너무 험할 것 같아 포기할까 생각이 들고 또 든다. 하지만 어쩌랴. 생각하고 망설이는 동안 이미 너무 많이 올랐다. 이 오른 거리가 아까워 아니 중간에 포기했다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올라야한다. 또 이제 내려간들 뭐 뾰족한 것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인터넷 뒤적거리는 것은 내 꼭 무슨 바보가 된 느낌이고, 책을 읽자니 요즘 들어 부쩍 는 우울증 때문에 그것도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우울증. 병세라 할 그 정도는 아니지만, 혼자 가만있는 시간이면 착 가라앉는 그 느낌 가끔 참기 힘들다. 논리적으로는, 하긴 세상일에 논리성이 적용되는 것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지금 우울해질 일이 전혀 없지 않은가. 뚝디 이 녀석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참 바쁘게 오간다. 뚝틀이보다 더 주인에게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며칠 전 너구리 건 때 다친 상처가 너무 깊은 뚝틀이는 당분간 근신, 오늘은 뚝디 차례. 이 녀석도 우울증인지 집에서는 항상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듯 멜랑콜리 그 표정이더니 지금은 신이 났다. 좋아하는 것이, 그 차이가, 눈에 보인다. 그저 주인이나 개나 쯧쯧. 어느새 정상. 사실 오늘 집을 나설 때 기대 하나는 그럴 듯했다. 저기 내려다보이는 청풍호를 배경으로 넣은 무슨 꽃 사진 한 번 광각으로 멋있게 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꽃은 없지만 경치 사진만이라도? 천만에. 이 우거진 나무 사이로 뭐가 보이겠는가. 이제야 생각이 난다. 지난 번 여기 왔을 때도 전망이 없어 실망했었다는 것이. 옆 봉우리를 향해 능선 따라 걷기. 이제는 뭔가 길다운 길이 보인다. 하긴 어느 산이든지 능선에선 그렇다. 그랬었다. 지난 번 이후 이곳으로 다시 올라오려 한 적도 있었지만 멧돼지 때문인지 뚝틀이가 하도 요란하게 짖으며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해 겁이 나서 중간에 다시 내려섰고, 그 후에는 계곡을 따라 이쪽 입구에 올 때마다 그 기억에 아예 오를 생각자체를 접어두곤 했고. 오늘도 사실 능선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서는 그 코스에서 신경이 얼마나 날카롭게 섰었던가. 어쨌든 결국 산 뒤쪽의 계곡으로 내려선다. 한 동안 비가 없어서인지 물이 많이 줄었다. 렌즈배낭에 카메라 들고 올랐지만 결국은 꽃 한 송이 찍지 못하고 그냥 하산한 꼴. 역시 다시 한 번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크게 실망되는 산행이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오히려 땀 흘리며 뭔가를 해냈다는 그 느낌, 뭔가 이룬 기분이다. 편하게 앉아 쉬는 뚝디 이 녀석도 마찬가지 생각인 모양이다. 아니 그런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