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작 vs. 행운아
그때 내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일단 카메라 내려놓고 두 팔 자유스러워진 다음, 거기를 넘어왔더라면.... 수없이 반복하는 rewind 작업.
그래도, 사실, 이렇게 몸이 아픈 건 어찌 보면, 축복 아닌가? 생각이라는 것은 사람을 좀 더 현명하게 만드니. 잠깐! 더 현명해진다고? 정말?
생각이 번져가며 ‘몸’이 아니라 가슴 아팠던 ‘일’들이 또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내 살아오면서, 수없이 rewind해봤던 지난날의 회한들.
‘난 실패작.’
‘경험’과 ‘후회’가 쌓여가면서 사람이 더 현명해진다고? 정말? 정말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보다 현명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럼 우리가 종종 보는 그 반대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하지? ‘현명’이라는 단어는 잘못 선택이다. ‘경험’과 ‘회한’으로부터 얻는 것은 기껏해야 ‘앎’이지 ‘현명’과는 거리가 멀다. ‘위험’의 실체를 경험해 봤기에 ‘매사’에 더 ‘위축’되고 ‘조심’하게 되는 것을 ‘현명’해진 결과라 잘못 이해하는 것이고, 대개의 경우 이것이 바로 나이와 함께 변해가는 삶의 모습이다. 사실 내 후회의 실체도 그 ‘위축’에서였지 않았나.
너무 ‘날’ 괴롭히지 않으려, 어떻게 해서든 내 ‘실패’의 책임에서 벗어나고파, 타임머신을 빌어본다, 내 앎, 그 ‘역사지식’과 ‘앞선 지식’으로 왕들을 ‘바로’ 보좌하고 백성들을 ‘제대로’ 이끌어 ‘옳은’ 길로 들어서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도, 잠깐! 그럼 그 당시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생각인가? 천만에. 사실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현인’이요 ‘선각자’는 있었다. ‘안타까움’은, 왕이 백성이 아니 ‘시대’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또 그들의 견해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들이란 존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타임머신을 탄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후진국으로 봉사 나가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그들의 힘을 집결시켜 그들을 이끌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큰 차원’의 고상한 뜻이 아니라 ‘내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그런 사람 수없이 많았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를 갈취했던 ‘악당’들. 하지만, 그들이라고 또 다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결국 ‘현명’이란 단순한 ‘앎’ 그 자체와는 상관없이 ‘낯선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에 앞서갈 수 있는 사고능력 판단능력이요 또 생존기술이다. 생존기술? ‘현명’이라는 고상한 개념엔 좀 어울리지 않는 ‘저급 표현’ 아닌가? 내 생각흐름의 방아쇠는 ‘실패자’란 단어였다. 사람들은 말한다. ‘성실’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성실하지만 ‘실패자’로 인식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지? ‘상황판단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정말?
나의 경우에도 혹 바로 이 문제가 있었을까? 다시 한 번 며칠 전 상황 rewind. 놀라운 장면들이 나온다. 저런! 저런, 저런! ‘설마’하는 생각에 ‘무모’하게 행동했던,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었던, 거의 ‘목숨을 건’ 저 장면들. 만일 저때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면? ‘결산’으로 치자면 ‘때 늦게’ 이 정도 부상으로 끝난 것이 오히려 다행 아닌가?
내친 김에 내 지금까지의 삶 역시 rewind해본다. 여기서도 계속 마찬가지다. 엄청난 불행을 불러올 수도 있었던 저 수많은 무모함의 연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나마 지금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나, 난 실패작이 아니라 오히려 행운아.
행운아? 내가 행운아라고? 그런 억지를 믿고 싶은 마음 전혀 없다.
휴~! 방금, 잠깐 일어나, 테이블 밑에 떨어져있는 땅콩 한 알 주우려다, 고꾸라지려.... 균형감각 상실한 이 상태에서...
결국 또 이 팔로 짚게 되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그래, 그래. 난 행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