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 2014. 10. 10. 18:11

오늘은 카메라와 렌즈배낭을 걸머지고 산행에 나섰다. 몇 달 전에 맨몸 산행을 시도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몸이 휘청거려 중간에 포기했었고, 오늘은 사고 이후 거의 정확히 1년 6개월 만이다. 그제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마당에 잡초처럼 자란 여우주머니를 찍다 발동이 걸려 물매화 동산으로 향할 때 들었던 생각, 이제 앞산 구절초 좀 찍어야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어진 것은 ‘생각의 합리화’ 과정, 그쪽 산은 너무 가파르고 힘들어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냥 사태골로 한 번 오를까 하다, 그곳 역시 워낙 돌이 많고 길이 불편해 넘어지기 쉬워, 비교적 넓게 다듬어진 길 ‘안전한’ 코스를 찾게 되었고, 그래서 떠오른 핑계가 용담. 어쨌든 이렇게 나선 것은 아주 큰 변화다. 사실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엄습해오고, 머릿속엔 온통 죽음 생각뿐이었다. 자살 사이트를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아무리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할 이유는 없고, 또 동의해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바로 그 더 이상 살아야할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그 '이유도 되지 않는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CT랑 MRI 속으로 들어갈 때 들었던 생각, 이것이 사람을 죽여주는 기계라면? 국가에서 관리하는, ‘편한’ 죽음을 원하는 자들을 조용히 죽여주는 그런 기계라면? 며칠 후, 병실에서 ‘영양주사’를 맞을 때, 거기에 곁들이는 ‘면역강화제’라는 약이 투입될 때의 이상한 느낌, 그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것이 사람을 죽여주는 약이라면?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서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죽음 그 자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는 방법의 선택과 그 고통이 두려워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길을 열어주는 그런 ‘국가 시설’, 이것은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좋은 일 아닐까? 하지만, 이런 것 다 쓸데없는 생각, 의지만 확고하다면 방법 선택은 사소한 일 아닐까? 조용한 산길을 오르는 오늘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은 역시 하나, 이렇게 조용한 곳 나무에..... 그러고 보니, 뚝틀이와의 산책 역시 18개월만이다. 나갈 때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동안 한 번도 풀어준 적이 없어 자유에 굶주렸으니, 이 녀석 멋대로 멀리 돌아다닐 텐데.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이 녀석 어쩐 일인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멀리 가라고 손짓을 해도 떠밀어도 내 곁을 떠나려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다시 목줄을 거니 좋아서 꼬리를 친다. 자유보다는 구속이 좋다? 별일이다. 전에 ‘용담밭’이었던 곳에 이르렀지만,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몇 개체만 눈에 띌 뿐. 아서라, 꼭 사진을 찍어야 맛인가? 배낭을 내려놓고, 햇볕 따뜻한 곳에 누워 잠을 청한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어보니 뚝틀이가 없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론가 가버렸겠지. 휘파람을 불어보니 바로 옆에서 나온다. 아마 내 근처 어느 그늘 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내려오려다 내친 김에 좀 더 올라가 반대편 사태골로 내려오기로 마음을 정한다. 원래는 사고 당시의 기억이 나 피하고 싶었지만, 밋밋한 코스로 다시 내려가기는 싫다는 생각. 그런데, 이게 웬일, 한참을 헤매다보니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뚝틀이 이 녀석 불안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니, 이 길이 아닌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봐도 계곡의 반대편으로 들어선 것 같아, ‘없는 길’을 헤치며 반대쪽으로 건너가니 익숙한 길이 나온다. 중간에 가시여뀌랑 투구꽃들이 보이는데, 모델도 좋아 보이는데, 카메라를 들이댈 ‘의욕’이란 것이 전혀 없다. 고개를 넘어와 ‘뻐꾹나리 밭’에 이르니 전에 없던 암자 하나가 들어섰고, 팻말이 하나 붙어있다. 눈에 보이는 것 어느 것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뭐라고 씌어있는데, 아마 금강경에 있는 凡所有相皆是虛妄(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나를 위한 문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좀 더 내려오니, 이게 무슨 일? 쾅쾅쾅 포클레인 작업 소리가 요란하다. 이 깊은 산속에? 놀랍게도 여기까지 길을 닦고 있는 중. 그곳을 지나 내려오면서 보니, 내가 피하려고 했던 사태길 그 돌길이 아주 말끔히 정리되어 편편하고 푹신푹신한 길로 다 바뀌어있다. 市에서 여기에까지 예산을 쓰는 것은 아닐 테고, 아까 그 암자에서 이 공사를 하는 것일까? 어쨌든 이쪽 길을 피하려 반대편으로 올라갔던 것이 ‘헛일’이었던 셈이고, 또 반대로 이 길로 올라왔다가는 중간에서 벌어지는 그 포클레인 작업을 보고 산행을 포기했었을 것이니, 오히려 다행이었던 셈이기도 하다. ‘헛일’과 ‘다행’, 또 지나쳐버린 사진이란 목표물, 삶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