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완연한 봄날, 집 앞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가 정겹다.
물소리 하면 떠오르는 기억, 화엄사에서 노고단 올라가는 길,
그 요란한 소리가, 마치 몸을 털어내듯, 전혀 시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큰 소리로 베토벤의 판타지아 코랄을 틀어놓고 있다.
이상하다. 이곡 합창이 시작되면 눈물이 흐르곤 한다.
그렇다. 해 진 후 집을 가득 채우는 계곡물 소리,
그것은 관현악과 합창이 어우러지는 소리다.
박자도 화음도 없는 자연스런 음악,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말하는 옴Om 그대로다.
20대 중반부터 귀가 어두워지기 시작한 베토벤,
32살 때 그가 자살을 생각하며 유서를 쓴 하일리겐슈타트,
그곳 피아노 앞에서 눈을 감았을 때 내 머릿속을 흘러가던 트리플 콘체르토.
우연이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것, 그것은 그가 바로 그 해 써내려갔던 곡이었다.
예약 없이 빈에 한밤중에 도착, 택시 기사에게 부탁해 머물었던 호텔,
아늑한 정원, 품위 있는 인테리어, 베토벤이 묵었던 방이란다.
오늘 문뜩 드는 생각, 베토벤의 귀엔 이런 계곡물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을까?
들리지 않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어느 쪽이 더 답답할까.
상상할 것 뭐 있나, 실험하는 셈 치고, 유튜브 화면의 소리를 꺼본다.
카라얀의 정교한 모션, 번스타인의 댄스, 두다멜이 미친 듯 흔들어대는 모습,
물결치는 단원들의 손놀림, 하지만 그 느낌은 관성 속에서 흐를 뿐이다.
이번엔 소리를 다시 살리고, 앞산을 바라본다. 선율이 살아난다.
편파적? 이번엔, 동물들의 쫓고 쫓기는 장면으로 돌려본다.
소리를 죽여도 실감나는 추격전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화면을 보지 않는 나에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소음일 뿐이다.
우리가 얻는 정보의 대부분은 눈을 통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삶의 지혜는 소리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책은 본다고? 읽는다는 것은 보는 것일까? 귀 기울이는 것은 아니고?
책장을 넘기며,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이 즐거울까, 아니면 듣는 쪽이 즐거울까.
‘아름다운 사람’을 두고 잔인한 ‘생각 실험’을 한 번 해볼까?
방음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기만해야 하는 운명의 한 쌍,
서로 만날 수는 없고 전화로 대화만 해야 하는 운명의 한 쌍,
어느 쪽의 사랑이 더 오래 지속될까.
피그말리온 신화가 힌트를 주지 않을까?
덤불머리 리키에서의 언니가 더 직접적인 대답이 되지 않을까?
사랑? 아름다움? 지혜?
맥베스 끝날 무렵에 나오는 왕의 독백,
“삶은 이야기야.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로 가득차고 분노로 요란하지만, 전혀 의미 없는 이야기.”
“Life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