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관리자, 지도자
대통령과 이장 또 동물주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망가진 소독약 분무기를 고쳐달라는 집사람, 오늘도 또 걱정거리. 며칠 전 뚝디가 제대로 걷지 못해 발 마사지를 해줬는데, 이번에는 뚝뚝이가 찔뚝거려 발밑을 들여다보니 물집이 생겼단다. 이 녀석들도 이제 열두 살, 사람 나이로 80이니 갈 때가 돼 그런 것이라 하고 싶지만, 험악한 분위기를 자초할 수도 없고..... 내겐 개는 그저 개일 뿐인데, 이 사람에겐 이 진돗개 세 마리가 반려견 수준도 한참 넘어선 인격체 수준. 편애는 금물, 어느 한 녀석에게도 그런 오해가 생기면 안 된다. 매일 각각 한 차례씩 세 번 산책에 그 거리와 내용도 비슷해야 하고, 간식거리는 그것이 아무리 조금이라도 정확히 삼등분. 이런 것을 ‘원칙’으로 전달받고 ‘부담’으로 느꼈다면 절대 못할 일이다. ‘사랑’이 기본이다. 사랑이 없는 주인은 그저 관리인일 뿐이다.
동네 이장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인수인계는 그 성사여부조차도 불투명, 新舊대결양상이다. 성공한 혁명은 있어도 성공한 개혁은 없다는 명제가 입증되는 모양새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시골에는 직접 피부에 닫는 정부의 지원이 많다. 수혜의 우선순위와 그 배분은 일상생활과 직결된다. 근로사업에는 누구를 투입할 것인가, 누구네 집 근처를 먼저 정비할 것인가, 저장가공창고는 어느 위치에 세울 것인가, 국가예산으로 지은 펜션 또 식당의 경영은 누가 맡을 것인가 등등, 마을의 생태계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따진다면 이장 권력이 대통령에 못지않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새로운 正義의 원칙에 의거한 利權 재분배, 이것은 구호일 뿐, 기득권을 놓치게 된 사람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인 반면, 앞으로 입게 될 혜택이 아직 그림상태인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생업도 힘겨운 상태, 갈등 당사자들 사이의 상대적 毒氣는 불문가지, 어쩌면 혈투에까지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마누라를 이장으로 세워? 갈등을 중재하며 전체를 키우는 지도력엔 일종의 타고난 카리스마가 필요한 법, 막연한 정의감에 인정까지 겹치면 이장 자리는 절대불가다.
최저임금제 논란과 정규직 전환. 언론은 아파트 경비원들이 쫓겨나고 영세자영업자들이 곧 망할 것 같은 호들갑, 보수파들은 '좌파'정권이 끼고도는 귀족노조 때문에 제조업이 붕괴한다고 경종, 일자리 못 찾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xx자동차 불매운동, ‘촛불혁명’을 부르짖는 정부. 혁명?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거기에선 절대권력의 이동이 있었고, 탄압과 몰수가 그 핵심과정, 그 어떤 반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516이 그런 모양새에 가까웠지, 지금은 그저 개혁을 바라는 표심의 표출에 의한 보직 위탁일 뿐. 몇 년 지나면 또 투표가 있을 것이고, 그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면 그저 일과성 혼란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마치 우리 마을 이장 교체처럼. 마누라의 ‘백성사랑’에 겹쳐지는 그림, 전에 있었던 독일 금속노조의 파업. 그들의 요구조건은 Manteltarif. 임금을 몇 퍼센트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업원들에게 똑 같이 ‘일정액’을 올려달라는 것. 이곳 상황으로 번역하자면 월 150만원을 받든 800만원을 받든 다 똑같이 50만원씩 올려달라는 것. 사회적 약자도 결국 내 형제요 내 식구요 내 민족, 상대방의 입장도 살펴가며 서로서로 배려하는 사회. 지도자의 역할이란 소속 개개인에 전체의 그림을 보여주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 이 노조의 지도자가 아마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관리자도 아니요 자기가 동물농장의 주인이라는 망상과도 먼 사람, 이런 지도자를 키우는 것도 선택하는 것도 다 국민의 몫. 이제 우리는 미국처럼 될 것일까 북유럽처럼 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