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이번엔 어쩐지 그냥 이렇게 틀에 박힌 말로 지나가고 싶지가 않구나. 그렇다고 무슨 ‘적당한’ 덕담 하나 들려주는 것으로 때우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이번엔, 네가 일어나면 읽을 수 있도록, 밤늦은 이 시간에(벌써 새벽이구나), 삶을 살아가는 한 ‘생각방법’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단다.
숭례문 복원공사 현장을 지나며 생각한 적이 있어. 저 집과 우리 집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역사적 그 건축물과 별 볼일 없는 우리 집 사이에 말이다. 내 생각엔 하나가 있어. 발판이란 공통점. 그곳도 사람들이 발판에 올라 서 짓고 있고, 우리 여기 지을 때도 발판이 있었고.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설계라는 ‘구상’과 건축물이라는 ‘결과’ 그것뿐이지. 그 ‘꿈’과 ‘실현’ 사이에서 ‘떼어내 버려진 발판’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위대한’ 사람과 나 사이에도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역시 발판이지. 발판 없이 형성된 인간이 어디 있겠니. 그런데 사람들은, 건축물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위대한 이’들의 발판에는 거의 본능적 관심을 보이지. ‘호기심’에서 일까? ‘멋진’ 학술지 논문을 읽은 후 ‘당연히’ 들여다보곤 하는 저자의 약력. 혹, 어쩌면, ‘그런 발판’이 없었기에 ‘이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위로의 근거’를 찾아보려는 마음이 그 밑에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한 인간이 성장하기까지에는 어떤 발판이 있을까. 우선 생각하게 되는 것은 태생적 발판. ‘멋진’ 나라 ‘굉장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하지만, 중국역사를 읽다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돼. 한 명의 새 황제가 서는 순간 희생되어야하는 다른 皇兒들. 운명의 희생자 그들이 글을 남긴다면? 그 속엔 아마도 ‘핸디캡’ 타령만 가득할 거야. 우리 눈에 비치는 잘 나가는 사람들 역시 그들 바로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꿈에 대한 생각은 맥락상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발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읊조림을 모으면 ‘불만 교향곡’ 하나 족히 나오겠지.
숭례문이 천안문보다 작으니 의미가 없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듯이, ‘나’ 역시 ‘위대한’ 사람들에 비해 보잘 것 없어서 의미가 없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겠지. 이야기는 결국 ‘삶’의 의미 쪽으로 흐르게 돼. 그 전에 우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생애 이야기들을 보면 어떨까. 거기엔 역경 이야기가 단골메뉴로 나오곤 하지. '성공의 필수조건'인 ‘逆발판’ 말이야. 어찌 꼭 예술가뿐이겠는가. 숭례문처럼 ‘큰 사람’의 경우도 우리 집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의 경우도 진정 의미 있는 성과는 다 역경을 거쳐 가며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발판 위에서 나온 것 아닐까?
중세가 아닌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은 일종의 ‘취미생활’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장난삼아’ 하는 공부가 스트레스 걱정 없는 최상의 방법이듯, ‘취미’삼아 사는 삶이 최선이란 뜻이지. ‘취미’에는 한 가지 속성이 있어. ‘생기는 것’ 따지지 않고 최선 다하기. 내 좋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취미에는 또 하나의 더욱 중요한 속성이 있어. 어려움이 닥치면, 또 실수가 거듭되면, 더 오기가 생기고 의욕이 더 강해진다는 것. ‘발판’의 성격이 변하는 대목이고, 그래서 삶을 ‘취미생활’이라고 내 즐겨 표현하곤 하는 것이지.
내 요즘 매일 가까이 보고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 山이란 자연, 그 속에 가득한 ‘경쟁자’들. 정말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위협하는 그런 존재들일까? 천만에. 그들은 서로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또 햇빛도 적당히 가려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에 ‘흙’이 무너져 내려가지 않도록 힘을 합치고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들이 경쟁자라는 것은 오해? 천만에. ‘큰 틀’ 즉 마크로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동식물 서로서로가 ‘흙’이란 그들 공동생활의 장을 ‘비’라는 외부로부터의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있다는 뜻일 뿐, 마이크로 세계의 관점에서는 ‘가까이 있는 존재’란 삶의 방해꾼 되기 십상이지.
요즘 유행하는 TV 프로그램 중에 배틀 오디션 과정이 있어. 둘 중에 한 명은 탈락해야 하는, 경쟁자와 함께 꾸미는 무대. 그런데 그들이 만들어내는 和音, 이건 사실 아름다움의 극치야. TV라면 뉴스도 틀지 않는 내가 반하는 시간이지. 그런데 난 사실 이들의 ‘어울림’보다는 오히려 경쟁자조차 협력자라는 발판으로 승화시키는 그들의 內空에 놀라곤 해. 평소 얼마나 갈고 다듬어야 아니 다듬었으면 결정적 순간에 저런 실력을 뽐낼 수 있을까. 거의 경외심 수준이지. 숭례문이라는 작품도 또 실리콘밸리란 유기체도 다 이런 ‘내공의 화음’들이 만들어낸 작품 아닐까?
아들아. 난 너의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그 긍정적 자세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 네 지금까지 이룬 성과가 자랑스럽다 하더라도 그건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일 뿐이고, 또 지금 답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며 쌓아나가는 내공 역시 발판이 되는 것이지. 무엇인가 최선을 다해 성실히 하는 한에는 절대로 잃는 것이 없어. 그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확인하곤 하는 진리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떻게 좀 딱딱하게 흘렀구나.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끔 그럴 수밖에 없어. 하지만, 오늘 또 한 번 강조하지.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 삶을 ‘취미생활’로 표현한 바닥엔 그 뜻도 깔려있어.
다시 한 번, 네 생일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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