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도솔출판사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뚝틀이 2009. 4. 6. 20:57

적지 않게 망설이다 이 모음집을 손에 들었다. 이름이야 ‘걸작선’이지만, 요즘같이 판권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기 십상인 이 시대에 걸작들을 한 권에 모은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하지만, 모음집에는 다른 매력이 있다. 편식이 습관화 되어있는 사람에게 다양한 성격과 구성의 작품들을 반강제로 밀어 넣어준다는 그런 장점 말이다. 책의 두께는 920페이지이고, 여기에 실린 작품 수는 40편이니, 한 편이 20~30페이지 정도인 단편들의 모음집인데, 책을 덮으면서, 역시 읽기를 잘했구나 하는 느낌이니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던 셈이다.

 

전통적 추리소설의 진행, 즉 어딘가 석연치 않은 냄새가 풍기는 사건이 일어나고, 천재적 탐정이 등장하고, 범인이 남긴 허점을 족집게처럼 짚어나가며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그런 소설의 재미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다.(잠수함 설계도, 거울속의 미스테리) 꼭 전통적 추리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우는 과정의 묘사만으로도 하나의 멋진 이야기를 꾸며낼 수도 있다.(너기 바,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 아예 처음부터 독자와 함께 사건을 꾸며나갈 수도 있다. 물론 마지막 반전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얼마나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는 독자의 능력에 맡기고.(균형을 잡아라!, 한 방울의 피, 누가 ‘귀부인’을 가졌는가.) 수사관도 손을 드는 사건으로 마무리하면서 독자에게만 그 사건의 진짜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산뜻한 느낌을 준다.(위험한 과거, 불운한 남자) 독자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할 자신만 있다면, 또 깊이 있는 심리묘사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완전히 새로운 틀의 소설도 가능하다.(금연주식회사, 족보연구, 남쪽에서 온 사나이)

 

하지만, 소설의 구성과 내용이 어떠하건 상관없이, 추리소설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있다. 우선, 독자가 그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작가의 의무고, 따라서 복선이란 형태로 살짝살짝 힌트를 흘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오리무중의 일방적 이야기가 너무 오래 계속되면 흥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요트 클럽,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나이) 적당한 기회에 이야기들을 뒤틀며 다시 혼돈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것도,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그 때문에 깔끔한 전개가 흐트러지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구나 단편 소설에서.(춤추는 탐정, 푸른 십자가) 설익은 전문지식을 자랑하다가 추리소설 본연의 분위기로부터 멀어진다면 이것 또한 문제고.(바람개비의 꿈, 이상한 월요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에 ‘짠’하며 기막힌 반전을 내밀며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이때 독자가 미소를 띠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소설은 성공이고, 그런 소설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 이 단편집뿐 아니라 현대의 추리소설 분야 전반에 걸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