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명화 달력 하나 사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연말이면 흘러넘치게 들어도던 달력들. 이제는 먼 옛 추억이 되지 않았나.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찍은 사진 중에 좋은 것 몇 장 골라서, 내가 찍은 예쁜 꽃 아름다운 경치 중 추려내어, 나만의 달력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사진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 많은 사진 중 어떻게 열 몇 장만 고를 수 있지? 한숨. 하지만 고르고 고르다보니 열 몇 장은커녕 몇 장도 힘들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르려니 구도도 틀렸고 초점도 맞지 않고 더구나 밝기 조절은.... 내친 김에 사진을 정리하기 시작. 그때그때 지우긴 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이런. 건질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클릭클릭을 하는 동안 느낌이 살아온다. 그때 그렇게 힘들게 올라갔는데, 그 깊은 국립공원 속에도 민박은 남아있었고, 거기로 들어온 차들, 주차된 차들,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그 눈초리. 거기를 벗어나며 보았던 개솔새. 찰칵찰칵. 발밑에 밟히는 흙의 질감. 나무 향기. 물 소리. 다람쥐. 숨이 끊어질 듯 힘든 계단 또 계단. 포기할까. 나를 반기는 투구꽃. 그 신비한 푸른 빛갈. 용담. 하늘. 먼 산. 시원한 바람. 먹을 것 펼쳐놓은 그 사람들. 기억. 기억. 느낌. 느낌. 사진의 질. 오늘의 관점에서 이렇게가 아니고 저렇게 했어야하는 것인데 하는 다른 생각이라도, 그때 그 당시 그 상황의 생생한 기쁨. 환희. 그 기쁨과 환희를 위해선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 기본 생각. 그 숨 냄새. 그 땀 느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별 것 아닌 수준이지만, 당시엔 마치 무슨 불후의 명작이라도 창조하듯 카메라 여기저기를 돌리고 만지며 이 자세 저 자세로 몸 사리지 않았던 그 애썼던 자신의 모습 또 그 성취감..... 그렇다면 오늘 다시 그 시간 그 장소로 돌아가 사진을 찍는다면? 예를 들어 금년 여름 다시?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년 후년이면 사진 기술과 사진에 대한 안목이 더 나아져 그 전의 사진이 더욱 더 유치하게 보일 것이 사실인데. 본질은 안목과 재주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늘어나는 과정에 느끼는 자연과의 교감 삶의 보람과 성취감 뭐 그런 것들 그 자체인데. 사진기라는 것을 그것들을 위한 당근이요 도구일 뿐인데.... 어찌 사진뿐이랴. 학생시절. 싸운도ㅂ뮤직. 시원한 풀밭. 알프스. 기차. 그 장면들은 사라지고 오직 느낌만. 느낌만. 치즈. 요들. 쏘시지. 현기증. 샹카. 메뉴힌. 검은 색. 느낌. 숨. 들뜬 불안. 삶. 실험. 논문. 강연. 사막. 모래바람. 위조지폐. 별. 베를리오즈. 환상. 환상. 환상. 달력? 내가 만든 달력? 느낌의 방아쇠를 당기는 사진들? 과거에 잠기는 달력? 잠 자는 숲속의 미녀? 그런 것은 없다. 오직 잠 자게될 한때의 미녀들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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