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이택광의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뚝틀이 2011. 1. 25. 19:36

오랜만에 읽은 재미있고 수준 높은 책이다. 혹, 인상파 화가 그림 몇 점 소개하며 지엽적 부분에 가십성 이야기나 잔뜩 붙여 넣는 일본류는 아닐까 하는 기우는 초반에 사라졌고, 그림 설명스타일이 곰브리치 뺨치네, 흐름설명은 거의 아르놀트 하우저 수준이잖아, 하는 무슨무슨 책과의 비교하는 내 독서습관도 여기에서는 다 날아 가버리고, 그저 저자 이택광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큰 매력은 그림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한 설명. 이 그림은 어디에 유의해서 봐야하는지, 여기 이 구도 또 터치는 다른 작가의 어떤 그림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또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며 왜 여기에 등장시켰는지, 배경에 보이는 이 모습 저 소품은 어떤 의도로 들어갔지, 설명 하나하나가 자상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 책이 인상파 화가들에 관한 것이라고 그들의 그림만 실려 있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와 화법의 차이를 설명할 때는 그쪽 해당 그림을 대비시키고, 한 작가의 화풍변화를 설명할 때는 또 그에 해당하는 그림을 나란히 놓는 등 독자의 이해를 돕는 일 그 목적의식엔 흐트러짐이 없다.

 

그냥 그림 설명만으로 가득 찼다면 다른 책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나폴레옹 3세 때 오르망의 파리 재개발 사업, 보불전쟁 패배와 파리코뮌에 따른 충격, 제3공화정에서의 혼돈, 이어지는 금융위기 등 프랑스사회가 겪는 격변과정 이야기를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권위적인 제도권 미술계로부터 배척 받는 이들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거나 초상화나 그려주는 것으로 생계수단을 삼으며(심지어는 피사로의 경우, 밭에 버려진 감자를 주워서 연명하기까지도) 실험정신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인상파라는 전체 그림'이 하나의 꿰어진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한 내용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마네-모리조. 모네-까미유, 드가-커샛의 커플 활동, 피사로와 세잔 고갱 사이의 인간관계, 마네와 카유보트의 역할, 또 화상 드랑뤼엘의 존재 의미 등, 단순한 가십성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유익한 이야기들도 듬뿍 담겨있다.

 

원래 그림이라는 것은 귀족들이나 즐길 수 있는 고귀한 것이었는데, 격변의 시대를 틈 타 부를 모은 무역상이나 상인들이란 중산층이 새로운 구매 세력으로 등장하지만, 자신들의 신분상승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인 이들에게 이 '고귀한 그림에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모델을 대상으로 붓 칠 몇 번 하다 만 것 같은 그림들'(전시회에 왔던 사람들이 분노에 차 그림을 훼손하려 하고 또 입장료 환불까지 요구했다고)이 구매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는 것, 그런 니치 마켓을 노렸던 한 부류가 바로 비르비종파(밀레가 여기에 속함)라는 것, 설명이 매우 논리적이다.

(追) 사실, 여기까지는 내 다른 곳에서도 읽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항상 궁금했던 의문, 그래도 그 예술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그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까지 곤궁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하는 그 의문이 여기서 풀렸다. 화상 드랑뤼엘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인 카유보트가 그림 하나 사줄 때, 또 모네가 자기가 번 돈으로 세잔의 그림을 사주었듯이 화가들끼리의 거래가 이루어질 때, 그들이 드디어 어떤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대충 그 그림 값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기에. 오직 거기에 모험을 걸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나 지불할 수 있는 그런 가격. 하긴,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들의 그림을 헐값에 내 놓을 화가가 당시나 지금이나 어디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