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魯迅小說全編

뚝틀이 2011. 2. 28. 01:15

루쉰의 산문시집 '野草'를 읽고 나니, 마치 어정쩡한 간식이 허기를 더 부추기듯, 무언가 허전하다. 아니 톡 쏘는 맛 그런 것이 아쉽다. 나도 모르게 집어 든다. 魯迅小說全編.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연변과기대생들이 손에 꼭 쥐어주던 작별선물. 张爱玲, 巴金, 魯迅 작품집 중 하나다. 그곳 있을 땐 주위의 '무수한 중국어 선생님들' 믿고 이 책 저 책 겁 없이 손에 잡곤 했지만, 이곳에 돌아온 후, 생각처럼 쉬 진도가 나가지 않아, 그냥 꽂아만 두었던 책. 이미 읽은 적이 있는 狂人日記와 阿Q正傳을 시작으로 孔乙己, 故鄕 등 손에 잡히는 대로 기분 따라 읽어 내려간다.

 

작가 루쉰(1881-1936)은 원래 의학을 전공하러 일본유학에 올랐던 사람. 하지만, 중국인 처형장면이 나오는 어떤 기록영화를 보고, 거기에 나오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며 분개하여 진로를 바꾸게 된다. 그의 말, '대체로 무지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훌륭하고 건장해도 바보 같은 구경꾼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중국인의 정신개혁이라는 사명의식에 글을 쓰기 시작한 그. 어느 인물도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가 일본에 힘없이 먹혀가던 그 당시, 바로 을사조약 한일합방 그 당시 루쉰의 이야기다. 단말마적 고통이 극에 달하던 당시 중국의 상황.

 

루쉰은, '깨우침'이라는 목적의식 하에,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품격 높은 문학적 표현 대신 평이한 구어체로, 시 수필 단편소설 평론 등 '짧은 작품'들을 써나간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어둡다. 현실 거의가 절망이었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생경한 이데올로기 선언문 식의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유머를 가득 실어가며, 막힘없이 시원시원한 문체로, 삶의 풍자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 비유와 풍자 뒤에 무엇이 숨겨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절망 속에 갇혀있지 않고, 차가운 자기 확인을 통해 그 비극적 현실을 발전적 의지로 승화시켜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 역시 읽는 사람 몫이다.

 

주인공의 성격이 다양하다. 다양한 입장에서의 자기성찰을 위함이리라. 광인일기는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피해망상증 사람의 기록이요, 아Q정전의 주인공은 약한 존재 자신을 알고 거기에 대한 심리적 위안방법까지 찾아내는 능력까지 있지만 전혀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공을기의 주인공은 비록 지금은 도둑질로 연명하지만 과거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존심까지는 버릴 수 없어 계속 이인텔리겐챠의 흉내를 내는 사람. 그 주인공의 위치에,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 속에서의 인간모습인 '나'를 대입해도 좋고, 유교전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던 당시의 '중국'이란 집단 이미지를 집어넣어도 되겠다.

 

狂人日記(1918). 어느 날 밤 달을 보고 '이제까지 30년 이상이나 전혀 제 정신이 아니었던' 자신을 깨닫고 기록하는 이 작품에서는, '자기는 남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반대로 잡아먹히게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세상 사람들'을 고발하며, '아이들을 구하라' 외치는데, 이 '食人社會'와 '아이들'이 유교의 억압적 도덕관념과 인민을 상징하며 비유하는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해석이지만, 루쉰 본인이 그렇게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니, 그 연상은 읽는 사람 각자의 몫.

 

孔乙己(1919). 루쉰 스스로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자평한 작품. 주점에서 일하던 소년 루쉰의 눈에 비친 공을기, 비록 지금은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신세이지만, 주점 손님 중 유일하게 장삼을 벗지 않고 술 마시던 그, 이토록 몰락하기 전 한때는 틀림없이 사대부 계급에 속했었을 그, 소년 루쉰에게 문자도 배워주던 그, 사람들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소년 루쉰의 눈에는 다른 오히려 사람들이 더 비열하게 느껴쪘고… 결국 외상값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그. 몇 년이 지나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 그. 아마 어디선가 죽었을지도…

 

葯(1919). 내용을 표현하기가 끔찍해, 여기 다시 재현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사실, 인혈 만두로 폐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는 광인일기에도 나왔었는데, 실제로 당시엔 그런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었을 수도) '이 나라의 주인은 우리들'이라고 외치다 처형당한 혁명가의 피라는 관점에서의 역할의 역설과, 무덤이라는 세계에는 권력자도 혁명가도 가난한 사람도 다…. 허무한 상징주의라고나 할까.

 

阿Q正傳(1921). 세계 각국어로 번역된 루쉰의 대표작. 서두부터 재담이다. 왜 列傳, 自傳, 別傳, 家傳, 本傳 그런 것 쓰지 못하고 正傳이란 단어를 고를 수밖에 없었는지. 阿Q가 이름도 성도 없이 마을 밖 사당에 살며 허드렛일로 연명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기보다 약할 것이라는 짐작에 싸워보지만 번번이 당하기만 하는 阿Q. 다혈질에, 자존심 강하고, 보수적인 阿Q, 그의 '정신적 승리 방법'이란 것은 고작 "나는 벌레야. 너희들은 벌레를 때리고 있는 거야! 됐어?" '혁명’이란 단어를 두려워하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阿Q,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그 단어를 닥치는 대로 떠벌리고 다니다, 결국 절도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싱겁게 총살당하고 만다. 阿Q가 구제불능 淸정부를 조롱함인지, 위기상황에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漢민족을 조롱함인지, 그것은 독자가 알아서 이해할 일.

 

故鄕(1921). 일인칭 화자 소설. 찬바람은 쌩쌩 몰아치고, 활기라곤 전혀 없는 초라한 마을, 이것이 내가 20년 동안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이던가? 발전된 것은 없고 그저 변화되어 있을 뿐. 어렸을 때 안아주곤 했다는 豆腐西施 아주머니, 본래 귀인은 눈이 높은 법이라… 빈정대다 어머니의 장갑을 바지춤에 찌르고 나가는 그. 예전에 농사일을 도와주던 사람의 아들 閏土, 보고 싶었던 그, 하지만 가난 속에서 아주 현실적이 되어 옛날 정겨운 모습의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그. 그곳 사람 모두들, 옛날의 내가 아닌 출세해서 달라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그들, 무엇인가 얻어가기만 바라는 그들. 마지막 장면의 나레이션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루쉰의 희망철학이라고나 할까?

希望本是无所謂有, 无所謂无的。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這正如地上的路, 其實地上本沒有路, 走的人多了, 也便成了路。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아서, 사실 본래는 길이 없었지만,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