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 시신 신원확인 요청. 이미 서영우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나(재희). 어렸을 적 회상. 엄마 따라 들어간 집. 남매사이이기 이전에 마음 속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오빠 영우. 그 오빠의 마음을 빼앗아간, 세 들어온 서산댁의 딸 혜주. 그 혜주를 탐하는 또 한 사람, 막강한 권력의 부잣집 아들 노상규. 반체제 운동가 서영우는 투옥되고, 혜주는 영우의 석방을 위해 노상규에 기대다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고, 사랑의 복수에 눈이 먼 노상규에 혜주는 삶 아닌 삶을 살다 결국 감금상태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 혜주를 잊을 수 없는 영우는...
책 초반, 여기 살짝 저기 살짝 치고 나가며 부드러운 긴장감을 일으키는 작가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빈틈없는 짜임새로 흐르는 애잔한 분위기의 나레이션,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완벽에 가까운 그 솜씨에 숨까지 죽이며 빠져든다. 하지만, '그저 또 하나의 진부한 러브스토리'가 될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까, 작가 박범신은 여기에 시사성을 부어넣는다. 서영우는 사상범 아버지라는 '원죄'라는 운명을 안고 살아야하는 할 운명의 존재로, 노상규는 친일파의 후손이요 정치군인의 조카요 정치권과의 결탁으로 승승장구해가는 재벌 집의 후계자로, 혜주는 정신대 고통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서산댁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길 소원하는 불쌍한 딸로.
내 물론 이 훌륭한 작가의 작품에 이러쿵저러쿵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그런 수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지만, 그래도, 차라리 중편소설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시사성을 빼는 것이 더욱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진하게 느낀다. 서영우 아버지 이야기에 무슨 실감이 살아나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영우의 투옥과 고문 이야기에 무슨 분노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서영우의 석방을 위해 혜주가 노상규에게 부탁하다 그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도, 아무리 그때 어머니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필연적 진행이라는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니 말이다.
두 사람 결혼 후 그 부분에 접어들자, '섬세한 어루만짐' 작가의 그 솜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치 전혀 다른 작가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결말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생각에 작가의 마음이 급해진 모양일까, 정말 '일품'이요 '완벽'에 가까웠던 그 구성과 표현 또 문장흐름 그 트레이드마크 대신, 방탕한 노상규의 의처증 섞인 복수극이란 그저 평범한 ‘스토리 전개’로 전락하고 만다. 더구나 전반부에 그렇게 애써 '꾸겨 넣었던' 시사성과의 연관성도 느낄 수 없다.
종반부 혜주와 서산댁의 구출작전에 이르자 이야기는 진부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급격한 품질 저하. 사람살이 그 어디에도 마찬가지이듯이 작가가 자신의 진수를 작품에 쏟아 넣을 수 있는 능력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정말로 좀 더 시간을 두고 정성을 더 기울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반의 기대가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 컸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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