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밖을 내다본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 비다운 비. 가끔 밤처럼 어두워지기도 해가며. 내일도 예보 상으로는 역시 비. 이럴 땐 책이다. 겨울 추운 날 바깥활동이 어려울 땐 한 주일에 서너 권씩 읽어냈지만, 새봄 들어 꽃 사냥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턴 잠들기 전 잠깐씩 펴드는 것이 고작. 이곳에 정착한 후 굳어진 새로운 생활습관이다. 요즘은 러시아 사상가들에 관한 책. 러시아 혁명 전후의 역사를 곁들인 참 깊이 있는 수필집. 책을 덮고 밖에 나가 뚝틀이 옆에 앉는다. 쪼그리고 앉아있는 이 녀석 모습 참 처량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 비가 그치면 다시 산에 가자 말을 거니, 무슨 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에서 꼬리만 조금씩 살랑살랑 흔들며. 개들은 사람의 눈을 피한다. 아무리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봐도 금방 눈을 딴 곳으로 돌린다. 복종의 의미일까. 궁금하다. 이 녀석 내 말을 알아들을까? 그래도 우리는 느낌으로 통하는 사이. 과자 하나 던져준다. 날아오르는 폼이 거의 날짐승 수준. 세 녀석 중 제일 날렵하다. 뚝뚝이는 좀 둔하다 할까 그저 적당히 움직이고, 뚝디는 생김새와는 달리 뛰어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문뜩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생각이 난다. 건강, 몸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포함하는 건강을 위해 무엇이 좋을까라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사진 찍기를 권하던 그 동아일보 사진기자. 경치 사진. 멋진 경치를 멋진 모습으로 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면 '적당한' 위치와 조건을 찾아 몸 아끼지 않고 다니게 되니 그냥 단순히 등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 되고 활동량도 많아진다고. 그가 강조했던 단어는 목적의식,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은 그에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부산물 성격. 하지만, 학생시절 그 엄청난 비용에 포기했던 사진을 생각하며 그냥 흘러듣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비록 경치사진 그 수준은 아니지만, 야생화 찍으러 다니며 가끔 그의 충고를 돌이켜 생각하곤 한다. 금년이 4년째. 첫해는 멋도 모르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야 꽃이 있는 줄 알고 전국 높은 산은 다 다녔다. 그것도 어느 산 어디 한 번 가볼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이 다른 꽃이 피지나 않았을까 하는 희망에 또 오르고 또 오르고. 목적의식. 그것은 희망과 동의어. 부산물? 사실 그 첫해의 소득은 엄청났었다. 대청봉에 그렇게 그것도 짧은 간격으로 여러 번 오른 적이 어디 있기나 했었던가. 한 주일에 세 번 오른 적도 있었으니. 내 체력이 이 정도인가 스스로 놀랐고, 내 의욕이랄까 욕심이랄까 아니면 정신력이랄까 거기에 놀랐었다. 그전 같으면 중간에 적당한 이유를 붙일만한 곳에 이르러 이제 그만 하고 다시 내려섰을 그런 곳에서도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마음으로 꽃이란 미끼를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딛다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상에까지 이르곤 하고,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절경에 이번엔 꽃 생각을 잊고 그저 스스로에게 흐뭇해하고. 내 물론 그 전에도 설악산 치악산 즐겨 다니곤 했지만, 사실 산을 타고 한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어째 이제 와서야 내 건강이 이리 좋아진 것을 느끼게 된 것이지? 적당한 이론을 생각해본다. 피톤치드? 옛날엔 뭐 그거 마시지 않았나? 하긴, 다른 것이 하나 있기는 있다. 그 전에는 서서 걸었다. 저 먼 곳에 있는 목표를 향해 고통을 참아가며 ‘운동’을 하던 것. 그것은 일종의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꽃 사냥은 다르다. 한 걸음 한 걸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꽃을 찾는 것, 목표지점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과정 그 자체가 목표다. 또 있다. 카메라 들이대는 높이는 꽃 높이, 이것이 꽃 사진 찍기의 필수자세다. 땅에 바짝 얼굴을 대고 땅바닥 또는 풀 높이에 코를 대게 되니 풀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비슷한 것(어찌 나무들만 해충을 막으려 이런 것 뿜어내겠는가, 풀들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을 깊이 들이마시게 되는 것. 사실 사진 찍기도 제법 긴장되는 일이다. 초점을 맞추느라 숨을 죽이고 또 참고. 이런 식으로 마시는 '풀 피톤치드' 흡입량이 제법 될 것 아닌가. 그것도 일종의 스트레스 성 등산이 아니라(중국어에서는 프로들의 산행을 登山이라 하고, 일반인들의 경우는 爬山 즉 산을 기어오른다고 하는데 사실 그 표현이 더 실상에 가까워...) 꽃 발견 그 희열의 두근거림 속에서 들이마시는 것이니 그 효과 제대로 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만나 이야기 나누었던 꽃미남 꽃미녀들 대개의 경우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미친 만큼 젊어지는 취미 이것이 바로 꽃 취미. 반대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본다. 내 그냥 서울에 남아있었다면?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바둑에 빠져있었거나 아니면 음악회나 연극 찾아다니느라 바빴을 것이다. 어쩌면, 전공과 관련되는 무슨 일엔가 몰두하여 그 야행성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 했을지도. 아니 또 어쩌면 골프나 치러 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려 투자클럽 뭐 그런 것을 했을지도 모를 일. 잘 되어간다고 한 잔, 일이 영 풀리지 않는다고 또 한 잔.(물욕. 위로는 끝이 없고, 손실을 입을 경우에는 자책감까지 겹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돈이라는 것을 왜 버는가. 바로 '언젠가'는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바라서가 아닌가. 지금 바로 그런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 술집 탁한 공기 마시며 전혀 건강치 못한 생활리듬에...) 서울에 살면서도 야생화 사냥에 나설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물론 그렇기는 하다. 단, 이론적으로. 야생화 동호회 회원들을 보면 소위 '서울'사람은 야생화만큼이나 희귀한 존재다. ‘수도권’을 서울이라 생각하면 얼마 있기는 하지만. 서울 한 번 빠져나오는 그 시간과 에너지, 그 생각만 한다면 야생화고 뭐고 그냥 집에서 푹 쉬지 뭐 그런 생각부터 날 것 아닌가. 외롭지 않느냐고? 천만에. 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참 좋아하지만, 가식에 찬 말들 늘어놓는 그런 사람 그런 분위기는 질색이다. 평생 그런 사람들 얼마나 만났던가. 또 있다. 이름 외우기, 이건 차라리 고역이다. 지금 여기 백년 넘는 소나무 수 십 그루 가운데 집 짓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의 로망 아닌가. (그런 것 모두 싫어서 외우는 것 필요 없이 발명 그 하나만으로도 살 수 있는 직업을 택하려 전자공학도의 길로 들어섰던 것 아닌가. 또 살벌한 돈 전쟁 그 세계가 겁나 연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고.) 사실 야생화에 빠지기 전에는 꽃은커녕 동식물 '그 따위' 것들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물며 이름과 특징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애쓰기야. 하지만, 야생화에서는 ‘외울’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워야하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잊으려 해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 이름인데. 또 있다. 좀 엉뚱하고 저속한 비유에 속할지도 모르겠지만, 야생화 사랑 이건 거의 돈죠바니 수준이다. 세상에 아무리 예쁜 상대가 있다 해도 얼마 있지 않아 그 미의 강도가 줄어드는 법, 그런데 이 야생화는 끝이 없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서늘한 가을바람 불 때까지 보는 꽃이 대략 이삼백 가지. 상대? 옆에 있어 즐거운 것이 아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대상. 캐어내 집에다 심어놓고 번식시켜 무슨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미안해하면서' 모습을 담고 그 사진 들여다보며 기쁨을 얻는 것. 그저 가서 보는 것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까 두려워 나 혼자만 그 장소를 아는 곳도 제법 되지 않는가. 연약한 존재 그 사랑의 대상이 어디 있는지 왜 세상에 알려야겠는가. 바쁘다 바빠. 하루하루가 정말 정신없게 지나간다. 그 어느 직장생활보다 바쁘고, 그 어는 직장생활 보다 더 넓게 멀리 돌아다녀야한다. 가장 중요한 것. 그 어느 직장생활보다 자연과 숲 속에 있는 시간이 많고, 그것도 희망과 희열의 순간으로 점철된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 꽃이 눈에 띄는 순간의 그 기쁨. 렌즈 속을 통해 보이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가슴까지 두근두근. 이 모습 어떻게 아름답게 담을 수 있을까, 바람이 잦아지기를 구름이 물러가기를 나무 그림자가 방향이 틀기를 기다리며 숲의 향기를 들이마시며. 절대적 美라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삶. 그것이 꽃에 미친 남자 꽃미남의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