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그날 - o

삶과 죽음

뚝틀이 2011. 8. 1. 20:56

오늘따라 이 길이 왜 이렇게 힘든지. 다른 때보다 더 자주 쉰다. 뻐꾹나리. 작년 이맘때쯤 피었었는데. 며칠 전 보니 아직 꽃은커녕 풀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다. 하지만, 꽃이 어디 꼭 뻐꾹나리라야 하던가. 오늘 산 초입에서 본 타래난초. 이젠 완전 활짝 핀 꽃밭이다. 그래도 힘든 것은 힘든 것. 이번 여름 이 유난한 비 그 엄청난 유량과 유속에 흙은 다 씻겨 내려가고 등산로에 남은 것은 어지러이 흩어진 돌들뿐이다. 더구나 어제와 오늘 비에 아직도 미끌미끌,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산행을 더 힘들게 만든다. 쉬자 쉬어. 급할 것 뭐 있나. 항상 배낭에 끼워갖고 다니는 간이쿠션 펼쳐놓고 자리를 잡고, 뚝틀이 목줄을 풀어준다. 이제 자유. 하지만, 이 녀석 가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지기 전에는 망설이는 폼이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 같아 대견스럽다. 가. 가. 한 바퀴 돌고 와. 손짓을 보고 숲속으로 달려간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 모자 채양 앞으로 뚝뚝 떨어지는 게 꼭 비오는 날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다. 왜 우리나라 회사들은 이렇게 만들지 못하지? 이것도 무슨 특허인가? 가벼운 산행 길엔 노스페이스를 쓰지만, 본격적 더위가 곁들여졌다 싶으면 항상 이 밀레다. 파는 곳을 알면 여분으로 하나 더 사놓을 텐데. 시원한 물 한 모금 들이키느라 고개를 들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옆 눈에 들어오는 날름거리는 뱀의 혀. 얼마 전에도 앉은부채 사진 한참 찍다보니 뱀이 옆에 있지 않았던가. 살모사, 도망갈 생각은커녕 기회를 보다 이제다 싶은 순간에 날쌔게 독을 뿜고 이를 박아버리는 살모사. 사람의 반응체계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단다. 숲 속을 거닐다 눈앞에 자리한 뱀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 뒤로 물러서는 것은 판단할 시간조차 아까워 바로 집행해버리는 비상본능이고, 그 후 여유를 찾아 다시 보고나서야 에이 나뭇가지였잖아 괜히 놀랬잖아하는 것이 보통의 인식과정이고. 놀란 상태에서 내려다보니 그것은 뱀의 혀가 아니라 몸부림치고 있는 지렁이. 그 움직임과 빨간 색깔이 (지렁이도 흥분상태에서는 색이 저렇게 변하나?) 시각범위의 가장자리에 들어오며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것. 이 녀석 왜 이 난리일까 들여다보니 옆에 무엇인가가 달라붙어 있다. 하얀 끈 같은데 배배 꼬여있는 모습이 처음에는 사람이 버리고 간 실에 엉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달팽이에서 나온 긴 몸체. 뭐 이런 달팽이도 있지? 아무리 요란하게 몸부림쳐도 지렁이에 달라붙은 이 녀석의 빨판은 떨어질 줄 모른다. 개입해? 자연에 개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어느 새 한 바퀴 돌고 온 뚝틀이 계곡물에 몸 담그며 나를 쳐다본다. 빨리 가자는 눈빛이다. 길은 점점 더 험해진다. 오르막 길 바위가 점점 더 미끌미끌. 마른 땅이라면 뚝틀이 앞세우고 그 끈에 끌려가며 힘을 더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오늘은 아니다. 배낭을 다시 내려놓고 지팡이를 짚는다. 한 손에는 카메라, 또 한 손에는 지팡이. 뚝틀이 끈은 허리에 차고. 땀이 정말 비 오듯. 중간에 몇 번 더 쉬고, 어쨌든 이제 목적지. 하지만, 뻐꾹나리는 아직도 소식 감감. 사실 오늘 이 꽃 폈으면 다음 주쯤 야사모 번개 한 번 쳐볼까 그런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은 이미 오는 길에 접었다. 오르막길도 너무 험하고, 또 무엇보다 길 양옆 가시덤불이 너무 우거져 바닥이 보이지 않아 사고 위험성도 높고. 이제 어쩐다. 여기까지 온 김에 신선봉 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 갑자기 숲속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멧돼지. 이 녀석 항상 이렇다. 뚝틀이 자기 생각엔 아마 나도 그의 사냥 파트너.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 사냥감을 내 쪽으로 몰아온다. 쫓겨 오던 멧돼지가 방향을 틀고 뚝틀이도 그쪽으로 따르는 듯싶더니, 어느 새 둘의 몸이 하나가 된다. 아직 줄무늬 모습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새끼다. 큰 새끼라고나 할까? 순간 겁이 덜컥 난다. 저 정도 크기면 아직 어미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리는 것은 금물이다. 개끼리 싸울 때도 주인조차 알게 뭐냐 물어뜯는 것 그것이 바로 개들의 야생본능인데, 지금 목숨 내놓고 싸우고 있는 저들을 어떻게 말려. 사실 내 이곳 산행 때 꼭 뚝틀이를 데리고 나서는 것도 바로 이 멧돼지 만날까 두려워서가 아니던가. 어쩐다? 이제 어미가 나타나면? 멧돼지의 비명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얼른 배낭을 내려놓고 우산을 꺼내 펼쳐든다. 예전에 무슨 프로그램인가 보았더니, 달려오던 멧돼지도 이렇게 우산을 쫙 펴니 흠칫 멈춰서던데. 자기 덩치만한 녀석을 물고 흔들더니 어느 새 싸움은 끝. 멧돼지 축 늘어져 눈의 초점을 사라졌고, 뚝틀이 온몸은 피투성이다. 뜨자, 자리를 뜨자. 뚝틀이 이 녀석 꼼짝도 않는다. 이 전리품을 어떻게 할까. 아까운 생각에 주인 말 들을 생각이 없다. 가자. 그래도 가자. 마지 못해 나를 따른다. 개울로 내려가 온 몸을 닦아준다. 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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