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탈출 열흘이 지났다. 2006년에 여기를 떠났었으니, 몇 년 만인가. 하긴 그때만 해도 여기가 본거지, 거기는 그저 잠깐씩만 들리는 그런 용도라 생각했었는데. 신기한 것은 이번엔 라면신세를 거의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저 어찌어찌해가며 끼를 넘긴 적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밖에 나가 때우는 그런 식도 아니었는데, 라면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장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렇다고,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괴로움에, 이상타 생각해, 약을 거른 것이 생각나, 어이쿠 하고 삼켰는데, 조금 후에 그 옆을 보니 조금 전에 뜯었던 봉지가. 결국 두 번 먹은 꼴. 과다복용 부작용? 또, 계속되는 악몽. 시골 있을 때도 괴로웠었는데, 여기 와선 더욱 심해졌다. 그 종류도 더욱 다양해지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과 연관된 꿈이 더 자주 나타나고. 밖에서 눈 치우는 소리가 난다. 어젯밤에 또 눈 왔나? 그러네. 창을 내다보니, 공원에 나있던 산책로 흔적 다 사라져, 하얗게 덮였다. 저 양반. 나보다도 나이가 훨씬 더한데, 무슨 일 있을까 밤새 눈도 못 붙이고, 이제 또 눈까지....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출발점이 다르다고? 집도 없이 굴다리 밑에서 지냈던 내 어린 시절보다...? 이런 생각 자꾸 하곤 하는 것도 자만이다. 아니 엄청난 교만이다. 지금의 날 봐야지! 투르게네프의 말 “If we wait for the moment when everything, absolutely everything is ready, we shall never begin.” 이게 내게 하는 말 아닌가? “So long as one's just dreaming about what to do, one can soar like an eagle and move mountains, it seems, but as soon as one starts doing it one gets worn out and tired.” 바로 이 말 말이야. 지금의 나에겐 마음속 가득 lamenting뿐. 아니, 어쩌면, 그의 이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Nothing is worse and more hurtful than a happiness that comes too late. It can give no pleasure, yet it deprives you of that most precious of rights - the right to swear and curse at your fate!” 지난 며칠 이 작가에 빠져있다, ‘무무Муму’ ‘트레조르Трезор’ 또 ‘눈 마주치는 개Собака’를 읽다보니, 내 뚝뚝이Туктуги 뚝디Туктий 그리고 뚝틀이Туктри, 이 녀석들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진다. 우리 3뚝이 이름. 미국인들한테서는 제대로 된 발음 얻어내기 ‘불가능’ 수준이지만, 러시아인들에게 이 청색글자 읽게 하면 그냥 자동으로 정확한 발음일 거다. 러시아 개? 천만에 순수 우리 진돗개. 그저 좀 무뚝뚝한 젠틀맨 레이디처럼 자라달라고 붙인 이름들이다. 얘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안전이 보장된 마음상태’ 그렇게 정의한다면, 아무 생각 없이 땅 파다가 잠자다가 하는 것 그런 것일 게다. 마치 지금 내 책 파다가 잠자다가 하듯이. 그런데, 누가 옆에 있으면, 불안해진다. 누구를 의식한다는 것,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방아쇠에 손이 닿아있는 총이 옆에 있듯이. 내 자기들 해칠 리가 없는데... 그들 옆에 다가가면, 꼬리를 흔들지만, 그래도 어딘가 불안해한다. 내 너무 넘겨짚는 것일까? 행복을 ‘보장된 안정속의 포근함’ 이렇게 정의한다면 이 녀석들 모습은 한결같다. 내가 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들은 먼 산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사람들과 대화할 언어가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생각할 능력까지 없을 것이라 넘겨짚을 수야 없는 일.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시작했다가도, 내 마음은 용수철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이들은 항상 무엇인가 아주 슬픈 생각하는 것 같다. 내 마음의 반영? 그냥 無念無想의 상태인 것 같아도, 그래도, 잘 들여다보면, 눈물자국이.... 어쩐지 그냥 동물적 생리본능 흔적 같지만은 않아 보인다. 초점까지 흐려진 눈. 그렇다. 투르게네프의 주인과 똑 바로 마주보고 있는 개, 그런 개는 없다. 내가 뚝틀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뚝틀이는 이마로 나를 본다. 각도는 앞으로, 촉각은 위로. 뚝디 뚝뚝이 다 마찬가지다. 측은해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꼬리 좌우로 몇 번, 내 손 핥아주기 한두 번, 그리곤 이내 ‘무뚝뚝’ 모드로. 하긴, 사람도 그렇지 않나. 꼭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서가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는 그 자체가 편해서 무표정의 상태로 들어가는데, 옆에서 보는 사람에겐 무슨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으로 비쳐지곤 하는 것이. 편안함. 뚝틀이의 마음용어로 번역하자면, 어떤 위험도 없고, 어떤 불만도 없고, 주인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어, 그냥 가만히 있어 좋은 자연스러운 상태. 그 때의 무표정. 물끄러미 어딘가에 눈을 향하고 있는 주름가득 불가리아 노인의 표정처럼. 행복. 행복감? 서쪽 산 위 구름이 붉게 물든 어느 저녁, 뚝틀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행복하니? 뚝틀이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주인님은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눈이 간 곳은 그의 목줄. 묶여 있는 나에게 행복하냐고요? 꼭 그렇게 묻는 것 같아. 온갖 자유 다 누리고 있는 주인님처럼 말예요? 그렇게. 그런가? 내 정말 자유로운가? 정말 나에겐 목줄이 없단 말인가? 내 정말 한 마리의 작은 새처럼 그렇게 자유로울까? 혹, 더 질긴 어떤 목줄에 내 질식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밥이 다 되었다. 구수한 밥 냄새. 참 이상하다. 이 구수함이 예전 같지 않다. 또, 몇 시간만 지나도 그 군내 왜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는지. 감각기관이 예민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이상이 오고 있는 것인지. 대만영화 飮食男女의 홀아비 (을.)랑씨웅郞雄이 생각난다. 그렇다. 그땐 내 중국어에 어찌 그렇게 빠져있었던지. 무엇인가에 계속 부딪쳐야하는 것, 그게 내 본성인가. 아니면, 잠재의식 어딘가에 심어진 내재적불안으로부터의 제2본능인 '버둥거리기'? 지금의 러시아어 바다에서 헤엄치기도.... 아서라, 아서, 이 머리는 나중에 태울 것 아니던가? 어차피 삶은 확률게임이다. 게임오버 메시지가 나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슬아슬'을 즐기며 부딪치고 튕기는 재미, 그저 적당해도 된다. 지금 이 손때 묻은 내 노트북만 해도 그렇잖은가. 그 동안 여러 번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어제 탁자위로부터 뉴턴의 부름을 받은 이후론..... 옆만 떨어져 나간 줄 알았었는데, 터치패드 밑 오른쪽 버튼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마치 자기 주인 오른 뺨 오른 팔이... 追) 결국 터치패드도 말을 듣지 않고.... 정든 강아지 보내듯. 이제 그 동안 버림 받았던 다른 노트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