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 또 에곤 쉴레Egon Schiele(1890-1918)를 ‘정리’하다, 결국, 아쉽지만, 포기하고 만다.
여기 내 블로그에 포스팅하기에는 너무 ‘외설적’이다. 아깝다. 내 그렇게 좋아하던 화가들인데.
이번엔 시대를 툭 튀어, 루시안 프로이드Lucian Freud(1922–2010)로 넘어가 본다.
원래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그의 야성미가 풍기는 그의 자화상, 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손자라 관심을 가졌었던 화가.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경우 역시 여기 내 블로그에 어울릴 만한 ‘非외설적’ 그림을 찾을 수가 없어, 역시 포기.
왜 화가들은 이토록 이런 쪽에 빠져드는 것일까.
르네상스 때까지만 해도 여체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화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재생’하려 또 신화나 종교 속의 어떤 ‘정신’을 드러내려 노력했었다.
하긴 누가 그런 ‘그냥 그대로 끌려들어가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지, ‘애쓴 후에야 느껴질 수도 있는’ 이런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겠는가.
그런데, 아주 이상한 것은, 내, 왜, 그렇게도 이상한 아니 역겹기까지 한 그런 그림들을,
‘너무나도 완벽했던 자기 이전의 ‘大家’들에 대한 '에덴의 동쪽' 식 반항이라든지,
또는, ‘새로움이라는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창작자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하며 이해해주고 싶은 것일까.
한동안 졸업미전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솔직히, '이해'보다는 '분노'가 앞서곤 했었다.
혹, 내, ‘美術史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과 ‘학생’ 그들 사이에 선입관을 끼어 넣은 것은 아닐까?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미술학도가 추천해준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거기에 나왔던 한 구절,
‘오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만이 미술이다.’
혹, 그들은 이걸 이렇게 아전인수 격으로 이해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미술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참 묘한 ‘옆길’을 찾아낸 피카소가 선구자 아닐까?
이해는 이해, 본능은 본능.
‘소비자’의 입장 나에게 맞는 ‘미술’을 정의해본다. 간단하다. 아주 단순하다.
그림틀에 넣어 내 거실 벽에 걸어놓고 ‘보고 또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곳 거기까지가 ‘미술’이고,
그 외는 그냥 ‘창작자 나름의 시도’요, 내 한 번 호기심에서 들어보는 ‘실험’일 뿐.
내 그 ‘미술’의 경계선에 놓인 그림들을 훑어 보려는 '당연히'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1904-1989)부터 찾는다.
하지만, 이젠, ‘흡인력’도 ‘매력’도 사라지고, 너무 ‘흔해빠져’ 진부한 느낌마저 들 정도. '깊은 예술'은 못 된다는 뜻.
대안으로 다다이스트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를 생각해봤지만, 이 블로그에 올릴만큼 '점잖은 대표그림'이 없다.
추억여행으로. 몽마르뜨르에 즐비한 화실 그곳을 들를 때마다 지갑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집에 걸어놓게 된 그림 몇 점.
(Oil painting이라 했더니, ‘기름이 흘러내리지 않게’ 특별 취급해주던 그 스튜어디스. 속으론 ㅎㅎ했지만, 얼마나 고맙던지...)
그 그림들을 굳이 분류해 어디에 넣자면, 글쎄, 앵포르멜informel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그림들을 여기에 올릴 생각은 없고, 구글 이미지에서 informel을 두드리니 이런 식의 화면이 펼쳐진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데. (정말?! 화가들이 나의 이 ‘無識 辯’을 듣는다면?)
informel 그림들
앵포르멜.
그림에서 Form이라는 것을 아예 배제해버리겠다며,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쳐 바르며 색채중심으로 표현하는 추상예술이다.
이 방향으로의 선구자이자 대표자는 쟝 포트리에Jean Fautrier(1891~1964).
이 그림에서 ‘큰 나무들’이 느껴지는가?
Les Grands Arbres, Jean Fautrier, 1959
그의 辯.
"The act of painting is not simply to spread paint on a canvas..... image will eventually become more real than reality itself."
그런데,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이 설명이 아니라도,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주 큰 나무들이 느껴진다. 멋있게 큰 나무들이.
앵포르멜에 대표주자가 아니라 쌍두마차가 있었다고 한다면, 또 한 사람은 쟝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
Jean Dubuffet, Dhotel nuance d'abricot, 1947 Dubuffet. Grand jazz band. 1944
내 한 때 ‘정신병동에 입원한 피카소’가 그렸겠거니 생각했던 이 그림들도 그의 솜씨다.
Trace of an Adventure, 1966 Quatre Personnages, 1974
지금은 너무나도 흔하게 ‘널려있는’ 그림들, 처음 봤을 땐 의아해했었다.
‘화가’라는 사람들도 이런 그림을 그리나?
여기에도 해설은 있었다.
정신병자나 어린아이들, 이들이야말로 어떤 문화적 관습에도 오염되지 않았고,
아무런 숙련이나 솜씨를 모르는 이들의 순수한 표현이야말로 진정한 예술.
이름 하여 ‘아르 브뤼’Art Brut.(raw art, ‘날것의 예술’)
그런데, 이 당시 미국이 추상예술의 중심이었다고?
폴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의 그림을 본다.
역사상 최고가의 경매를 기록한 탓에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그런 것 상관없이 어쩐지 마음을 끄는 그림이다. 어차피 난 이런 종류의 그림을 좋아한다.
바닥에 천을 깔아놓고 거기에 페인트를 붓고 터는 ‘행위’로
‘액션페인팅’이란 새 지평을 연 그의 이 그림.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식별할 만한 대상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데 뭘 이야기한단 말인가.
플록에게 있어서 회화란 ‘물감 묻은 평면’이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이른바 ‘all-over painting'.
이럴 땐 진중권 같은 말꾼의 이론이 차라리 마음에 와 닿는다.
칸트는 자연을 탐구하기 전에
이성을 가지고 이성부터 비판했다.
마찬가지로 회화 역시 ‘현대성’에 도달하려면
자연을 재현하기 전에 자신부터 점검해야 한다.
회화가 현대적이려면 자연의 재현을 멈추고
저 자신(형과 색, 화폭과 물감)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회화가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다른 장르나 매체에서 온 요소들도 배제해야 한다.
가령 고전회화는 공간의 환영을 창조하여 스토리텔링을 했다.
하지만 스토리는 문학에 속하고, 공간은 조각의 언어다.
따라서 이 요소들 역시 회화에 이질적인 것으로 배제해야 한다.
그 결과 남는 것은?
당연히 추상일 수밖에 없다.
No.5, 1948
허전하다. 전문가의 설명을 찾아본다.
실험미술. ‘실험’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독일민족의 특성인가보다. 새로운 야만인neue Wilden이라 불리던 일군의 독일화가들.
프랑스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거의 점령당한 상태에서 이 ‘주체운동’의 주동자는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 (1938-),
내게는 그저 ‘거꾸로 그리기’ 화가 그 정도의 기억이었는데,
이번에 찾다보니 오히려 ‘손가락으로 그리는 Neo-expressionist’로 더 알려져 있단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니겠지만) 야수는 야수,
붓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그리다니.... (신기한 것은 이 그림들을 '바로' 돌려놓고 보면 그게 오히려 이상해진다는 사실.)
Elke I, 19725 Finger painting – Apple tree, 1971-1973
Fertigbetonwerk, 1970
‘변화’에는 ‘반동’이 따르는 법. ‘난장판’ 미술계에 대한 반발로 ‘복고’를 지향했던 일단의 화가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루시안 프로이드. 그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들 (하지만 시작 때 이야기했던 대로 여기 올릴 수는 없는 일이라 그저)
사색의 깊이도 묻어나는 느낌을 주는 그의 자화상 하나만 여기에.
Lucian Freud Portraits, 1985
내 눈이 아주 ‘보수적’이어 그럴까? 난 ‘깨끗하고 산뜩한’ 쪽이 좋다. 그런 관점에서 난,
자기는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1932- )를 앵포르멜의 대표주자로 여기고 싶다.
Abstraktes Bild, 1988
그의 그림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 해설 한 번 들어본다.
내친 김에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도 한 번.
이 ‘작업현장’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봤다면? 루벤스가 봤다면? 고흐가 봤다면?
그들 각각의 표정과 반응을 상상해보며.... 어떤 장면은 눈에 선히 들어오는 듯...
중요한 것은 이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미술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
(아직 독일어를 못하는 분들은 영어 자막을...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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