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 Zaharovich Chagall(1887-1985)
드디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샤갈의 차례다. 자료의 출발점은 역시 Wiki, 여기저기 뒤져가며 그의 그림들을 찾아 나선다. 좀 더 쉬운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다가, 아니 오히려 이렇게 헤매는 것이 더 좋지,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마치 야생화 찾아 숲속을 헤매듯.
샤갈은 유대인이다. 출신이 무슨 상관이겠냐 마는 이 사람 이야기 나오는 곳마다 유난히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곤 한다. 곳곳에 유대 風이 묻어나오는 그의 작품들을 보다보면 "The quintessential Jewish artist of the twentieth century"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일단 그런 그림 한 점.
The Fiddler (Le violoniste). 1912-1913
장난삼아 이야기하자면, 샤갈의 생일부터 좋다. 1887년 7월 7일. 인상파 화가들의 ‘大作 홍수’ 그 시절이다. 물론 인구 5만의 반이 유대인인 Belarus의 작은 도시에서 생선가게를 하던 그의 부모가 파리의 미술계 동향을 알 리는 없었겠지만... (장난은 그만, 帝政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자면, 일단 러시아 중심부에는 진입금지 -그래서 서쪽인 벨라루스- 여기서도 대도시엔 거주금지, 또 농지소유도 금지 -그래서 소도시인 Vitebsk로- 결국 일종의 ‘유대인 집단구역’이 형성되고 -그래서 인구의 절반- 공립학교에도 갈 수 없으니 -유대인들끼리 만든 학교에서- 일자리는 없고 -그래서 기껏해야 가게나-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가 그린 부모의 모습.
The Spoonful of Milk, 1912
7살 때부터 그림에 천부적 소질 보인 소년 샤갈을 그 엄마 어떻게 해서든 키워주려고 뇌물 또 가짜서류 등으로 1908년(21세 때)에 St. Petersburg의 미술학교에 입학.
22살 이 젊은이, 고향에 있는 14살 소녀 Bella Rosenfeld와 눈이 맞아.... 하지만 부유한 그 유대인 보석상에게 이 무일푼 화가지망생이 마음에 들 리가 없고.... 이후 35년간 계속된 두 사람의 그림 같은 사랑의 시작 이때의 느낌을 샤갈이 그의 자서전....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그린 아담과 이브의 모습.
Adam and Eve, 1912
1910년, 23세 청년 샤갈의 재능을 눈여겨 본 유대인 변호사 Maxim Vinaver는 후원을 약속하며 샤갈을 파리로 보낸다. 프랑스 말 한 마디 못하는 그가 시간을 보내곤 한 곳은 루브르 박물관. 거기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들을 보며 공부하기. 그는 특히 고흐의 거침없는 표현법에 감명을 받고, 이어서 피카소를 만나 점묘주의 야수파 입체파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작가 Guillaume Apollinaire와 친분을 맺게 되는 것도 이즈음.
입체파 분위기가 묻어나는 이 시기의 그림 한 점.
I and the Village, 1911
후원자가 보내주기는 하지만, 미술용구를 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돈. 궁여지책, ‘짜깁기 식’ 캔버스 재활용.
To My Betrothed, 1911
자기 몸에 딱 맞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그.
The Soldier Drinks, 1911-12
The Cattle Dealer, 1912
A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 1913
하지만 어쩌랴, 들려오는 것은 오직 그저 ‘너무 저속하다’는 혹평뿐.
힘들고 외롭고 그의 마음속엔 오직 Bella뿐, 이제 그녀의 나이도 열아홉, 혹 딴 사람과....? 그 사이 절친한 친구가 된 Guillaume Apollinaire의 제안. 독일을 공략해보는 것은? 1914년 그의 소개로 독일 미술 전문지 Der Sturm의 편집인 Herwarth Walden를 만나 베를린에서 단독 전시회. 호평 일색.
이 기쁜 소식을 Bella에게 전하려 ‘잠깐’ Vitebsk로 들어갔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던가, 그 사이를 못 참고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전쟁 선포, 할 수 없이 발이 묶인 샤갈.
그녀 부모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드디어 이듬 해 1915년에 결혼. 그 다음 해 딸 Ida를 낳고서야 老少의 화해.
러시아에 ‘갇혀있던’ 이 시기, 하지만 사랑의 달콤함에 흠뻑 빠져있던 이 시기, 몽환적인 연인들이 화폭에 담겨진다.
The Birthday, 1915
변하는 세상,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제는 유대인도 더 이상 下等民이 아니고 러시아인들과 동등이란다. 거기에 안녕과 번영까지 보장해준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그에게 Vitebsk 지역 예술 담당관 제안이 들어오고, 그는 그것을 덥석 받아들이고... 이로써 Vitebsk Academy의 예술적 수준은 급격히 고양되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내성적인 그는 따돌림 당하며 그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 결국 1920년에 그 자리를 사임. 고정수입이 없어진 그는 극장에서 소품 작업이나 하며...
The Promenade (La promenade), 1917-1918
혁명에서 최상의 선전도구는 당연히 예술. 하지만 그의 화풍은 별무소용. 용케 병역면제를 받게 된 그(군에 갔더라면 유대인 병사는 소모품...), 또 용케도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독일로. 그가 베를린에서의 전시회를 열었던 1914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후. 당연히 우선 Herwarth Walden부터 찾아가지만, 그로부터 듣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당신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당연히 작품 150편도 모두 팔렸다. 그 ‘적지 않은’ 금액을 은행에 넣었는데, 인플레이션으로 이젠 휴지조각보다도 못하게 되었다.(손수레에 돈을 싣고 장을 보러간다느니, 술로 세월 지샜는데 나중에 빈 병을 파니 돈이 더 불어나더라 하는 그 유명한 이야기들은 다 이때...)
그 말 믿지 못해 재판까지 걸어보지만, 어디 무엇 하나 건질 수가 있어야.... 내 나이 35, 거기에 처자식까지... 인생무상...? 천만에.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된 그의 명성, 어렵지 않게 다시 파리에 일자리 하나 구하고,
1924년 파리에서 또 1927년 뉴욕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고...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때 5년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라고....
이제 그의 그림 분위기는 침울함에서 벗어나 ...
Peasant Life, 1925
Fruits and Flowers, 1929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 갈 수 없는 것이.... 이 또 무슨 운명인가.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하자 antisemitism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그의 상실감을 나타낸 당시 그림 하나.
Solitude, 1933
독일은 그렇다 쳐도 고국 러시아의 상황은....
원망스러운 볼셰비키 혁명을 조롱하는..... 이 그림 중앙에 레닌의 모습을 보면.....
The Revolution, 1937
雪上加霜. 1937년, 나치는 독일 내에 있던 샤갈의 작품 59점 압수해 ‘타락 예술’ 전시회까지 열고....
White Crucifixion, 1938
십자가 밑 유대인들은 사방으로 도망가느라 정신없고, 왼쪽 오른쪽에선 나치와 볼셰비키가.
(피카소의 Guernica와 함께 이 White Crucifixion이 20세기의 ‘전쟁증오’ 대표작이라고....)
당시 작품 또 하나.
A Midsummer Night's Dream. 1939
이 그림을 본 피카소의 말, “I don’t know where he gets those images. . . . He must have an angel in his head.”
내친 김에, 피카소에 대한 샤갈의 조크 한 마디도. “What a genius, that Picasso. It’s a pity he doesn’t paint”
1939,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대전 발발. 1940년 프랑스 북부 전체가 독일 점령 하에...
유대인 샤갈에게 이건 이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에 세워진 괴뢰정부가 샤갈 체포.
예술가를 아끼는 미국의 압력.
샤갈은 1941년에 뉴욕에 도착, 자기가 이미 국제적인 지명도를 가진 인물이 되어있다는 것을 실감.
유대인으로 러시아 독일 프랑스에 살았던 기억은 2차 대전으로 더욱 더 증폭되고, 이런 불안감이 그의 그림에 반영되어 붉은 색이...
Listening to the Cock, 1944
끝없는 불행. 1944년, 샤갈의 부인 Bella 갑작스런 감염, 전쟁으로 인한 치료약품의 부족, 사망.
For the first time since childhood, Chagall set aside his brush and easel. He would be unable to paint for almost an entire year.
1946년, Virginia Haggard McNeill와 결혼.
Cow with Parasol, 1947
다시 파리로. 그리고 25년간이나 작업해오던 이 그림 완성.
The Falling Angel, 1923-1947
러시아를 떠나올 때 시작한 이 그림엔 그 사이 화풍 변화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어.
1950년, 63세. 이제 세상에서 숨으려 지중해 연안 작은 마을로... 하지만, 그의 명성은 이제 최고조에 달해...
(당시, '세속인'들에게도 유명했던 삼인방은 마티스 피카소, 그리고 샤갈.)
1952년, 그림에만 미쳐 자기는 생각해주지 않는다며 두 번째 부인 Virginia가 이혼 선언.
說, 說, 說. 일설에 의하면 샤갈이 그리는 그림의 얼굴이 하나같이 Bella의 얼굴이어서 그걸 못 참았다고.
또 다른 說에 의하면 다른 사진사와 눈이 맞아...
외로워하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딸 Ida가 소개한 여자는 Bella와 비슷한 모습의 여인 Valentina.
하지만 이 부인은 샤갈의 말에 의하면 이 여자는 폭군이요, 자기는 감옥소에 갇힌....
(사업성이 밝은 이 여자의 강권에 결국 기독교로 개종. 그 후 '무수한' 성당과 교회의 채색창 그림작업을...)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네. 이제 그냥 그 후의 그림 순례.
Les Amoureux, 1957
Dance, 1962
Moses before the burning bush, 1960-1966
Siren with Pine(Sirène au Pine ), 1967
Jacob's Ladder, 1973
stained-glass windows for St. Stephen Cathedral in Main, Germany, 1978
Flower Bouquet, 1982
1985년 사망(98세)
'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리 이후 (0) | 2013.05.14 |
---|---|
후안 미로 (0) | 2013.05.12 |
그림 보며 웃어보기. (0) | 2013.05.07 |
파울 클레 (0) | 2013.05.06 |
바실리 칸딘스키(Wiki에서) (0) | 201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