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그날 - o

움츠려든 삶

뚝틀이 2018. 3. 19. 03:14

축구장에서 소리 높여 응원가를 부르고 싶고, 무대 바로 앞에 앉아 연극을 보고 싶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의 은은한 조명을 즐기고도 싶고, 빨간 스포츠카로 트란실바니아 산길을 달리고도 싶다. 하지만 이곳 산골마을에 움츠리고있는 내게 그런 것은 다 생각세계에만 존재하는 그림일 뿐. 그렇다고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삶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요즘은 프랑스어 또 스페인어에 푹 빠져 있다. 마치 일본어와 한국어처럼 문법이란 관점에서 사촌과 같은 이들. 그런데 어쩌랴, 어제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시제변화가 오늘 갑자기 혼란스럽기 그지없게 느껴지는 그런 식이니. 독일어와 러시아어에서 골치를 썩이던 격변화가 여기에선 좀 느슨한 게 그나마 다행아닌가 고작 그런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으니.

 

문뜩 궁금해진다. 내 어쩌다 이렇게 왜 외국어에 매달리게 되었지? 적당한 설명을 찾기 힘들 때 사람들이 즐겨 붙이곤 하는 단어, 잠재의식. 내게 해당될 수도 있겠다. 피난민 어린 시절, 거대한 쇠바퀴 위에서 무섭게 흰 증기를 뿜어내는 시커먼 쇳덩어리들이 자리한 기차역, 또 미군의 주둔지였기도 한 그곳, 철조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피난민촌. 낮에는 철길에 각종 쇠붙이를 올려놓으며 실험하다 말끔한 제복의 아저씨들과 시커먼 기관사에게 쫓겨나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살금살금 철조망으로 다가가 쇠줄을 걸어놓고 깊은 밤에 그것을 당겨 조명탄을 터트리며 사이렌 소리와 쏼라쏼라’ ‘이상한 사람들의 요란 떠는 모습을 마치 몰래 서커스단 천막 그늘진 곳에 숨어 보듯 즐기곤 하던 그런 것이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취미 차원이 아니라 거의 병적으로어학에 매달리는 내겐 그보다 더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증상이 나타난 것은 대학생활 시작과 함께였다. 그렇다. 병적 속성인 열등감,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20명이란 단출한 규모의 학과동료, 그들은 자라나온 환경도 정예 중 정예였고,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테마도 말투도 내가 알아온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에 또, 학비 생활비를 마련하려 연속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만나게 된 세상, 안에 들어가니 보이는 다른 모습그것은 가히 중격적이었다.  한없이 초라한 내 모습, 어떤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 앞날, 내 열등감엔 다 ’이 붙었다. 취업? 그런 저차원적걱정이 아니라, 한마디로 삶다운 삶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를 경멸하는 또 하나의 가 내게 이른다. 열등인간 네 자신을 인정하라고숙명적 삶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라고. 또 다른 가 반항한다. ‘바탕배경에 무관하게 노력 그 자체가 보상을 받는 그런 세상이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라고. ‘비교가 아니라 절대가치를 높임으로서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인간나를 고양시켜 줄 그 무엇인가는 없는 것일까? 전공실력?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너무나 당연한 그따위는 말고 다른 그 무엇인가 말이다. 마치 필수 취미로 여겨지듯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바둑 음악 독서 그런 것으론 어딘가 허전했다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내 발길이 향한 곳이 바로 남미의 낭만이 또 쉘브르의 우산이 펼쳐지는 의 계단 그곳이었고, 당시로선 전혀 엉뚱하기 짝이 없던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학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배우고 배워도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는 주먹구구식 언어인 영어와는 차원이 다른 이들 언어, 그 어법과 문법에 녹아있는 논리성에서 때론 수학의 향기까지 느껴졌고, 바로 그 매력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치 바둑에서 정석의 모양 진행그 바탕 사고를 파악하고 나면 그 체계적 지식실력으로 이어지는 보상보장된다는 그런 의미에서 말이다이런 것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배경도 환경도 또 그 어떤 세속적 판단기준도 무의미, 오직 나 자신에 의한 나의 평가그것만이 중요했다.

동기야 어떻든 과정이야 어쨌든 또 그동안의 성취야 어쨌든, 이제는 마치 빛바랜 사진을 들쳐보듯 인터넷 소설이나 신문을 읽어보곤 하는 것이 고작인 신세. 다시 일어나고 싶다. 빨간 스포츠카로 달려 축구장에도 연극 관람 후 레스토랑도 즐기고 싶다. 다시 날아올라 그리스로 불가리아로 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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