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임종욱의 '1780 열하'

뚝틀이 2009. 1. 23. 21:06

습작 수준이다. 그런데 참 귀엽다. 남이 애써 써놓은 책에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전혀 악의 없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기분 좋은 만족감의 다른 표현이라고나 할까. 강희와 옹정 그리고 건륭 이들이 누구인가. 중국 역사상, 적어도 영토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융성한 시대를 이룬 황제들 아닌가. 작가 임종욱은 이들 중 건륭을 택했다. 건륭이후 淸나라가 급격히 쇠퇴하게 된 것을 이민족 지배를 벗어나려는 漢族의 필연적 반항 때문이라는 암묵적 설정에 집어넣고, 여기에 사도세자의 비극 이후 아직 기반을 충분히 다질 수 없었던 정조의 원대한 포부를 결부시키며, 당시 淸이란 실체를 인정하기 아직 힘들어하며 明 숭배세력이 지배하던 조정의 분위기에 연암 박지원이라는 개방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혹 독자들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힘들어 할까하는 노파심에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별도의 일람표로 정리하면서까지.

 

이야기는 두 개의 트랙을 달린다. 현재라는 무대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끼어들게 되어 사선을 넘나드는 정문탁 교수와 첼리스트 송민주, 당시라는 무대에서는 원인 모를 연쇄살인 사건에 얽히게 되는 건륭제의 고희축하 사절단 일행. 하지만, 이 책을 추리소설 범주에 넣기엔 좀 아쉬운 점이 있다. 작가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나 할까 아니면 아직 덜 세련되었다고나 할까. 원래 미스터리소설의 묘미는 작가가 중간 중간에 던져놓는 미끼를 물며 그 복선의 의미를 더듬어가면서 독자도 그 추리의 과정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것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게 전혀 없다. 밑도 끝도 없이 사건이 터지고,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중국 공안의 우왕좌왕과 청와대의 분위기, 더구나 현재 트랙에서도 과거 트랙에서도 거의 슈퍼맨 수준의 비밀결사 대원 활약상, 여기에 난데없이 청나라를 마당발로 누비는 이상한 승려, 조정대신과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청나라 둘째 갑부인 조선 피난민의 자매. 이 툭툭과 덜컹에 그저 어지러워, 아직 얼마를 더 읽어야하나 하며 남은 부분 두께를 확인하곤 할 정도였으니. 책을 덮을 때쯤 되어서야, 아 이런 종말을 세워놓고 그렇게 먼 길을 돌아오게 했구나 하는 허탈감이 들게 하는 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책 두 권을 끝까지 읽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연암 박지원에 대해 더 알게 된다는 지적 욕구를 따르다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큰 이유는 작가의 문체 덕분이라 하겠다. 절제된 문장과 차분한 화법.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사교 파티에 섞여들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생각의 깊이가 있는 묵직한 사람과의 진솔한 대화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깨어난 그런 느낌이다. 귀엽다는 표현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다. 다음 작품에선 이 귀여움이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