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

뚝틀이 2009. 1. 22. 18:26

이것이 책이다. 이것이 소설이다. 포르투갈의 작가 사라마구. 그의 책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따옴표도 물음표도 느낌표도 없다. 단지 마침표와 쉼표. 그 사이에 글자들이 자리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말,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 그런 구별 없이 그저 말이 말에 이어진다. 책 첫머리에,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을 묘사하는 이야기가 나올 땐, 무슨 분위기 도입부 정도로 생각했다. 눈이 안 보여라는 말도 그런 상징적 맥락으로 여겼다. 그러다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저 읽고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의 쉬지 않고 읽어내려 갔다. 등장인물들엔 이름이 없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눈이 먼 사람, 집으로 데려다준 사람, 안과의사, 그 의사가 대했던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그 여자가 호텔방에서 만난 손님, 그 호텔의 청소부, 이런 식으로, 마치 둘둘 말리는 그물에 줄줄이 엮여 올라오는 생선들처럼 나타날 때의 정황이 그들의 이름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경로로 등장했건, 작가의 생각을 역할분담으로 대변하는 그들. 그것이 그들이 등장하고 존재하는 이유다. 통속적 이름보다 이렇게 불리는 그들이 더 정겹다. 갑작스레 번지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전염성 안질환에 감염돼 외부와 격리되어 수용되는 그들. 눈이 먼 초기엔 차 도둑이나 창녀란 사회적 속성의 관성주행을 계속한다. 하지만, 계속 밀려들어오는 눈먼 자들, 완강한 외부세계 입장을 일깨워주곤 하는 군인들의 총소리와 스피커소리, 그 속에서 위선이란 허울은 힘없이 벗겨져버리고, 사악하고 이기적인 원초적 본능은 다시 살아나며, 스스로를 다스릴 질서라는 규범을 강제하는 존재를 만들지 못하는 그 눈먼 자들만의 사회는 심리적으로도 또 환경적으로도 짐승의 세계와 다름없는 원시적 상태로 변해가며, 과거와의 연결고리는 하나하나 끊어져간다. 어쩌다 형성된 그 수용소 내부 무장집단의 물질적 착취와 성적 전횡에 인성 최후의 코너에까지 몰린 눈먼 자들, 수적 우세라는 강점을 살리지도 못하고, 사나이이기조차 포기한 사람들을 대신해, 유일한 눈뜬 자라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던 의사의 아내는 급기야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가위로 잔인하게 찔러죽일 수밖에 없게 되고, 극한적 수치심에 시달리던 불면증 여자는 그 폭행집단 거처에 불을 붙이다 결국 수용소 전체를 태워버리게 되고, 그 수용자들은 그 사이 군대라는 조직은커녕 눈뜬 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변해버린 도시로 탈출 아닌 탈출을 하게 되고, 이제 수용소와 다를 바 없는 아니 수용소보다 더 열악한 원시적 상태에서 먹이를 구하려 헤매는 존재가 되고, 첫 번째로 눈먼 사람 몇은 결국 그들의 눈 역할을 하는 그 의사의 아내에게 삶의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고, 그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는 그 안대를 한 노인과 정신적 결합을 이루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다시 눈을 뜨게 되고, 이 소설의 백미, 그 등불역할을 해오던 의사 아내의 상징적 독백,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소설의 원제는 blindness 즉 눈멀음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이야기가 아니다. 눈먼 자들의 이야기다. 유일하게 눈뜬 자 그 의사의 아내는 다름 아닌 바로 작가자신이다. 이들의 세계를 만들고 이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저 높은 곳 그 위에 있는 작가가 아니라 피조물 눈먼 자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또 다른 모습의 작가이다. 메시지를 요란하게 들먹이지 않는다. 당위성을 외치지도 않는다. 그냥 세계는 흐르고 이야기도 흐른다. 눈이 먼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유란 무엇인가. 안락함이란 무엇인가. 당연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이야기할 때 그 통념적 논거는 무엇이고 그 한계는 무엇인가. 말의 기교도 없이, 사고의 유희도 없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묻지 않고, 진실보다 더한 진실이야기가 배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