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사라진 시체, 동일수법의 또 다른 사건을 겪게 되는 소녀, 그 기억상실증 소녀의 치료를 맡게 되는 젊은 의사, 수사에 나서는 노련한 시체검시관과 그의 조수격인 형사, 이들의 용의선상에 오르는 막강 건축업자. 이야기의 시작은 여느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작가의 한계성이라는 덫’이 보너스로 제공된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셰익스피어에 매달린 전력도 있는 예일대 법대교수 신분의 저자. 그는 이 데뷔작에서, Younger를 1인칭 해설자로 내세워 정신분석에 관한 자기지식과 그 분야의 당시 대가들에 얽힌 에피소드를 팩션 형태로 쏟아내고 있다. 그 덫이 이야기 흐름의 걸림돌로 여겨질지, 아니면 하나의 보너스로 다가올지,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뉴욕 곳곳에 들어서는 고급 맨션과 교량, 당시 그곳의 사교계, 압박수사로 코너에 몰리는 건축업자, 그를 자신과의 알리바이로 감싸주는 시장,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손을 터는 검시관, 사실은 모든 것이 자작극이었다고 털어놓는 소녀, 그 자백을 믿을 수 없는 형사, 자신의 환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젊은 의사, 그들이 벌이는 사투에 가까운 추적. 고전적 루팡 전집에서나 애거서 크리스티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자존심 얽힌 갈등에 휘말리게 되는 정신분석의 대가들 뒷바라지에도 힘겨워하는 젊은 의사는(그래서 상대적 의미로 그의 이름이 Younger) 이 소녀와의 진실게임에서 놀림감이 되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좀 모자랄 것 같다는 역설적 이유로 차출된 형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 능력을 더해가며(그래서 그의 이름이 Littlemore), 사건의 실체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패럴럴 트랙을 달리는 Sigmund Freud, Carl Jung, Brill, Ferenczi, Jellife 등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갈등, 그들의 개인적 스캔들, 또 정신분석 자체를 배척하는 당시 신경학자들의 역겨운 권모술수에 관한 이야기. 아무리 사실 자료에 기초했다고 하지만 (물론 법대교수인 저자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마는) 명예훼손의 경계선을 훌쩍 넘어선 것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된 실명 스토리들, 또 그 해석의 각도를 달리하며 반복되는 To be or not to be.
어색한 번역에 읽기가 좀 불편했던 것 말고 작품 자체에도 몇 가지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사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1인칭 나레이터가 자주 3인칭의 인물로 변하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빈약하고,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점은 마지막 부분에서의 너무나 급격히 반전 카드를 내밀었다는 점. 나름대로 추리하며 따라가다가 요건 몰랐지 하며 내미는 카드에 좀 멍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지엽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중요한 점 하나. 현대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볼 때와 다르게 프로이트를 너무 신격화하고, 칼 융을 비열한 인간으로 깎아내리기만 한 점. 혹 작가도 유대인의 동류의식으로 그를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아, 읽는데 투자한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재미있는 책이었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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