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의 유적. 신비의 전설 속으로 사라진 그 사람들의 돌덩이 다루는 솜씨. 거대한 크기의 돌들을 마치 퍼즐조각처럼 다듬은 다음 짜 맞춘 그 성벽과 신전. 구성요소로 보면 조각과 조각이 그 기본을 이루고 있지만 종이 한 장 끼워 넣을 틈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그 이음새는 그 벽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고 있다. 작가 천명관. 그의 소설 고래를 읽으며 잉카의 그 유적 돌 성벽을 떠올린다.
교도소에서 풀려나온 춘희. 폐허로 변한 벽돌공장을 뒤덮은 개망초와 들꽃들로 이야기가 열리고, 박색노파의 저주받은 삶, 애꾸눈 딸, 다른 불행의 씨앗 금복, 파란만장 그의 삶에 얽힌 생선장수, 꺽정, 쌍둥이, 딸 춘희의 이야기로 시공을 넘나드는 돌 퍼즐조각으로 널려진다. 하지만, 그 조각들은 이미 예고된 엉뚱한 죽음이란 운명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마치 잉카사람들이 돌이란 퍼즐 덩어리를 손에 잡을 때 이미 마음속에 어떤 크기를 정해두듯이. 작가 천명관의 돌 다듬기에는 그냥 대충 넘어감도 없고 쓸데없는 부풀리기도 없다. 그 자유분방한 우화와 픽션 또 판타지 놀이는 결국 노파-금복-춘희의 세 단계로 이어지는 줄거리라는 ‘돌 벽화’에 앞뒤와 위아래 모양을 빈틈없이 탄탄하게 맞추어 집어넣기 위한 ‘다듬기’와 ‘맞추기’ 작업의 일환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슨 메마른 정밀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박식함으로 신명나는 마당놀이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이야기의 구성과 진행뿐 아니라, 시각적 효과를 노리는 그의 탁월한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세 개의 삽화. 책의 중간을 넘어선 다음 금복이 내미는 고래그림 하나, 춘희의 싸인 격인 개망초 꽃 그림 하나, 벽돌에 기록된 원시형태의 묘사도. 그 악센트가 강렬하다. 더구나 책의 끝 부분에 텅텅 빈 백지들이 나타나, 인쇄가 잘못 되었나 생각하다가, 그 맨 밑 부분에 나타나는 단 한 줄,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이런 페이지가 계속될 땐 미소한 절로 흘러나오곤 했다.
또 그가 가끔 툭툭 내던지는 말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인생을 살아나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
읽는 기쁨을 한층 더 키워주는 작가의 천부적 소질이라고나 할까.
모양도 좋고 짜임새도 좋다. 책에 푹 빠져 들었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졌었다. 하지만, 하지만, 허전하다. 아주 허전하다. 깊이가 있는 대화에 함께 했던 것도 아니고, 무슨 엄청난 운명의 힘에 공감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냥 한 편의 돌 벽을 감상했을 뿐이다. 하기야, 지금 우리 한국 문단에서 ‘영혼이 있는’ 소설을 만나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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