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김영하의 '빛의 제국'

뚝틀이 2011. 1. 14. 12:41

싸끄르께르 사원 아래, 공원에서 막 붓칠을 시작하던 화가, 그 화가의 범상치 않은 손놀림에 걸음을 멈춘다. 물감이 찍혀가며 캔버스에 윤곽을 드러내는 집과 나무와 언덕 모습. 그래. 바로 이거야. 여백. 동양화의 흰 여백을 품은 서양화. 이런 그림을 내 얼마나 찾고 찾았던가. 숨을 죽이고 그 그림의 탄생과정을 지켜본다. 저 그림은 내 꺼야. 값이 얼마건 상관없이. 공손하게 말 한 번 걸어볼 기회를 찾지만, 워낙 진지하게 그림에 열중해있는 그를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 저런! 왜 하필 거기에... 아니, 저런, 저런! 세상에! 결국 캔버스는 온갖 잡동사니 떡칠로 가득해지고....

 

산뜻한 문장에 적당한 긴장감. 얼개도 좋고 흐름도 좋다. 하지만, 빛의 제국 이 소설을 읽어나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몽마르뜨르 언덕 그 장면이 생각난다. 물론 소설이라는 것이 줄거리만 가지고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랑 마주 앉아 대화할 때 그 상대방이 무슨 단어가 떨어지자마자 그래 내 거기에 대해서도 이런 것 알고 또 이런 것도 들어본 적 있지 물론 그 비슷한 이런 것도 알고 말이야 하며 이것저것 정신없이 꾸겨 넣곤 한다면 그 산만하고 어지러운 대화에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소설이라는 것 역시 독자와의 대화고, 대화의 기본은 여유 또 여운 아니던가. 타임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한국작가의 이 작품에 대한 서평을 읽고 손에 잡았다, 실망만 안고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