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그날 - o

외운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뚝틀이 2011. 1. 26. 14:11

참 이상한 일이지. 내 어렸을 적 외우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했는데.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아무리 외우려고 해도 외울 수가 없었는데. 능력이 안 되었다기보다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고나 할까.

제일 싫었던 과목이 생물이었고. 이건 뭐 어느 것 하나 외우지 않고 할 일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지. 그 다음 싫어했던 것이 역사였고. 몇 년도에 누가 누구랑 어쨌고 하는 것을 외우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역사 담당이라 선생님 보기도 정말 미안했고. 또 하나 싫었던 것이 한문 시간. 더구나 한시를 읊으며 칠판에 뭘 막 적어나가는 선생님을 보면 이상한 생각까지도 들었었고. 그래서 내 전공도 외우는 것 전혀 필요없이 그저 생각 또 생각하는 그것만이 중요한 그쪽을 책했던 것이고.

그런데 지금 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정말 이상하게도 야생화, 이건 생물 아닌가. 또 역사책 읽기. 그리고 또 중국어. 정신없이 외우고 잊으면 또 외우고.

잠재의식일까? 어렸을 적 그렇게도 싫어했던 것이 내 삶의 구멍으로 남아있었고, 그래서 그 공허한 구석을 채우려는 욕구가 생겼고, 아니 나에게 비어있었던 그쪽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새 세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외우는 것은 지금도 질색이다. 아니 전혀 그런 쪽 능력이 없다. 요 며칠 전, 저 아랫마을 아이들 이름 기억해내려고 하는데, 가물가물할 뿐, 전혀 기억이 나질 않고. 그래도 그 이름을 기억하려고 했던 것은 그 녀석 참 독특한 성격에 행동이라, 그것이 생각났던 것이고.

기억? 그것도 외우는 것 아닌가?

천만에. 외운다는 것은 단어와 숫자가 그 대상이라는 뜻이고, 기억이라는 것은 그 정경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기억은 그때 그 상황을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머릿속 그림을 끌어내는 것이고, 상황이라는 것은 그 전과 그 다음을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기억은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생각이고.

그렇다면 내 지금 가장 빠져있는 야생화는?

그 야생화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야생화의 아름다움, 그 야생화가 겪어야하는 어려움, 그런 것을 이겨내야 하는 처지를 이해하려하는 것, 측은함은 내 생각일 뿐이고, 자연은 자연, 현실은 현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자연 내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놀라움. 여태까지의 내 생각 그런 것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차원의 섭리랄까. 그 생각에 야생화에 빠져들게 된 것이지, 무슨 야생화 이름 몇 개 외우는 취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중국어 역시 마찬가지.

처음에는 그저 외국어라는 생각에 카세트테이프를 틀곤 했지만, 같은 모양의 글자가 어떻게 우리가 쓰는 의미와 중국인들이 쓰는 의미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궁금해졌고, 그러다보니, 그쪽 생활환경의 어떤 면이 우리와 다를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중국어를 배우다보니, 한시도 접하게 되었고, 또 역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중국이라는 역사에서 그 역사와 철학과 문학은 서양에서와는 달리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몸통 그 자체라는 것에 경탄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이 철학 쪽으로 나를 끌게 되었고, 그 관성으로 결국 유럽 쪽 철학과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제 와 생각해보니, 중국의 사문철뿐 아니라 사람의 삶이라는 것 역시 사문철 일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

우리 삶의 의미를 생각하다보면, 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여러 가지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그런 생각 그런 이해가 추상적인 상태 그대로 있다가는 그냥 혼돈 속으로 무너져 내리게 되니 어차피 많은 것을 기억에서 다시 찾아 끌어내야하고, 바로 그런 것을 우리는 단순히 외운다는 피상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게 되고.

결국 외운다는 것은 첫걸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고와 이해의 결과물로 남는 기념비적 흔적 바로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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