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올린 네귀쓴풀 사진에 댓글이 붙는다. 참 대단한 체력이라고. 글쎄 이 양반 내 그날 모습을 봤다면? 좀 있으니 다른 글이 따른다. 체력이라기보다는 이 꽃을 보고 싶은 열망이 이루어낸 기적이라 부르고 싶다고. 옳소, 정곡이오. 얼마 전부터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대청봉에 다시 한 번 오르고 싶은데, 무리일까?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떠나면 되지. 준비물 간단히 챙겨 차에 오른다. 이번에는 미리 근처에 가 묵을 생각이다. 운전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느라 힘들었던 지난번 기억에. 황태구이 정식 그 별미를 즐기며 주인에게 묻는다. 단체손님만 없다면 여기서 묵고 싶다고. 여섯 명 한 팀이 오는데 아예 다른 층으로 쓰게 하면 되지 않겠냐고. 어차피 오색으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던지라, 등산용 주먹김밥까지 부탁하자, 덕담까지 곁들인다. 내일은 잘하면 금강산도 보일 정도로 날이 좋을 것이라고. 글쎄, 나도 일기예보 보고 왔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3시 알람. 고양이 세수 후 방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김밥 챙겨들고 문을 나선다. 칠흑 같은 밤. 히야! 왜 미리 준비 안했지? 손전등. 희미하나마 반응을 하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다. 물론 비상용 LED 두 개는 항상 열쇠고리에 달고 다니지만 그건 문자 그대로 비상용일 뿐. 한계령. 밤샘 영업하는 포장마차에서 따끈한 커피 한 잔 마시며 산 쪽을 올려다본다. 이번 산행은 어떤 모양이 될지.
안개 자욱한 이 어둠 속 아니 안개비를 뚫고 나가는 희미한 불빛. 익숙한 길이라 힘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길 잘못 들어 올라갔다 다시 내려와 제 길을 찾으며 스스로를 탓해본다. 치밀치 못한 내 자신에 내리는 벌이라고. 희끗희끗 눈에 띄는 금마타리 돌양지, 푹 젖어있는 이들이 참 가엾어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의 반영일까. 대충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할 것이란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짙은 안개비. 가다 쉬다 반복하니 진전이 없다. 서두를 것 뭐 있나. 서둘지 않으려고 이렇게 일찍 출발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밤은 걷힌다던가. 두루미꽃 찾아서 자주 오던 곳. 이젠 아담한 씨방이 맺혀있다.
삼거리를 지나 능선에 들어서니 본격적 난코스가 시작된다. 경사가 심한 것이 아니라 길이 험하다. 능선이란 무엇인가. 비바람에 견디는 돌들이 남아있는 산의 갈빗대 아니던가. 제멋대로 쌓여있고 널브러져 있는 돌 틈 사이를 한 손에는 카메라 또 한 손에는 손전등으로 지나다니 참 미련한 차림이다. 하지만 어쩌랴. 배낭에 이 덩치를 집어넣을 수가 없는데. 참, 그렇지. 아직 아침 전이네. 적당한 곳 찾아 김밥 몇 조각 입에 집어넣는다. 인체란 아니 생체란 참 놀라운 기계다. 이렇게 조그만 것에 담긴 에너지 꺼내어 몇 킬로씩 갈 수 있다니. 첫 번째 어긋남. 생수 마시려다 놓쳤는데, 데구르륵 밑으로 구르더니 바위 아래로 떨어진다. 집으러 내려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아깝지만 어쩌겠나. 본의 아닌 자연훼손. 꼭 전과자 된 기분이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다른 것을 놓쳤다면? 생수는 아직 한 병이 더 있으니.... 터리풀과 노루오줌보다는 참조팝나무랑 산꿩의다리가 더 자주 눈에 띄는 곳으로 접어든다. 난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제 힘들고 위험한 코스는 다 지났다는 것을.
안다고? 산행 때마다 느끼는 것. 내 기억과 예상은 항상 내 바람일 뿐이고, 실제의 모습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 오르막길 내리막길은 계속되고 미끄러운 돌들이 앞길을 계속 막는다. 비에 무너져 내린 곳을 긴급보수한 곳까지. 험한 곳 벗어나니 시들은 박새들이 을씨년스런 풍경을 연출한다. 거기에 또 웬 까마귀들이 이렇게 음산한 분위기를 더하는지. 어쩌면 난 이렇게도 운이 없을까. 사실 이번 산행엔 은근히 운해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고 또 맑은 하늘 곁들인 설악산 절경도 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이 안개와 구름은 내 마음을 몰라준다. 지난 번 급히 카메라를 배낭 속에 집어넣어야할 정도로 내리던 비, 그 정도는 아니니 다행 아니냐고 위로 삼아야할까?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라진 희망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삶이 그 하나고 이나마도 다행 아니냐는 생각으로 자족하는 삶.
에너지가 달린다. 다시 김밥 몇 조각에 장아찌 후 생수 몇 모금 마시니 한결 나아진다. 에너지에는 두 가지. 물리화학적 에너지와 추상적 안도감.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곳이 보인다. 앉은 자리 옆을 보니 사방이 단풍취. 아직 철이 아니지만, 보름 쯤 지나 굉장한 세력일 이 꽃밭을 머릿속에 그려보는데, 딱딱 등산스틱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양손에 지팡이 집고 ‘쏜살같이’ 지나간다. 차원이 다른 사람.
어느새 반가운 고목 아치가 나를 반긴다. 서북능선의 상징물처럼 되어있는 이 아치. 이번엔 확실히 안다. 여기서부터 끝청까지는 마치 집근처 야산처럼 전혀 부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 중청까지가 온갖 야생화의 보고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물레나물이 눈에 들어온다. 야산에서 찍던 꽃과는 그 싱싱함 차원이 다르다. 들여다보니 가운데 분수가 있다. 암술 모양이다. 여태까지 몰랐던 사실. 렌즈 바꾸기 귀찮으면 사진 찍기를 포기하라 했던가. 마크로 렌즈로 바꿔 들여다본다. 그 신기한 모양.
조금 더 오르니 이번에는 세잎종덩굴.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흔한 꽃은 아니다.
토현삼. 역시 높은 산에 올라야 볼 수 있는 꽃이다.
끝청. 이제 어려움은 끝이다. 안내판 글귀가 오늘따라 재미있게 느껴진다. 참 상징적이지 않은가. 할머니들을 마주친다. 웬만해선 할머니란 표현을 쓰지 않는데, 이분들은 정말 할머니다. 지난 번 산행 때, 앉아 쉬고 있는 나에게 젊은이 기운 내 하던 그 할머니들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염색 그런 것 전혀 없는 백발이고 얼굴엔 병색이 완연하다. 안녕하세요, 건네는 말투도 참 어눌하다. 의문은 금방 풀린다. 그 다음 할머니가 길을 비켜주며 하는 말, どうぞ. 일본인들이다. 아마도 오색-대청-한계령, 나와는 반대 코스로 가는 모양이다. 놀라운 사람들.
중청대피소가 목전이고, 저 앞이 대청봉이다. 생각보다 많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내려갈 시간 걱정할 그 정도는 아니다. 이쪽 코스에서는 사람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여기 대피소에선 제법 여러 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 오색 코스로 올라온 사람들. 혹시나 하고 생수 있나 물었더니 역시나 당연한 대답. 품절이란다. 할 수 없이 캔 커피 하나.
이제 다른 곳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네귀쓴풀과 바람꽃의 본고장.
빛, 빛이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곳에 오를 때마다 운이 없는 것을 어떡하겠나. 고려청자 그 분위기를 상상하며 셔터를 누른다.
범꼬리 모시대 잔대에는 눈도 주지 않고,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등대시호에는 찰칵.
이제 대청봉.
이제 남은 일은 오색으로 내려가기. 하산 길에는 정말 관절에 조심해야 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천천히 내려가기로 단단히 마음 속 다짐을 한다. 지난 번 어두워진 다음 빗속을 내려갈 때 얼마나 고생했던가. 귀신들 오가듯 그 현란한 반딧불이들. 천천히, 천천히, 오늘은 천천히. 계곡 물소리가 반갑다. 빈 페트병에 물을 가득 담는다. 뿌옇다. 맑은 줄 알았는데 뿌옇다. 하지만, 따질 것 어디 있나. 그냥 꿀꺽꿀꺽 마셔대고 또 채운다. 갈증이 무척이나 심했나보다. 오색 입구에 도달할 땐 이 새로 채운 병이 다시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