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tolomé Esteban Murillo(1618–1682)
내 기회 닿을 때마다 찾곤 했던 세비야Sevilla,
나중에 모차르트가 ‘결혼’시키는 롯시니의 ‘그 이발사’ 때문은 아니었다.
(둘째는 유모차에, 첫째는 그 옆에서, ‘야자수’ 공원을 산책하는 사진.. 지금 누구 집엔가....)
루부르에 걸린 ‘거지 소년’ 그림으로 ‘그’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후 몇 곳, 또 까디스Cadiz에서도 ‘그’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던
바로크 시대의 스페인 화가 무리요에 반해서였다.
하긴 ‘무식한’ 나만 몰랐었지, 무리요는 당대에 이미 프랑스와 영국에 까지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화가라는데....
루브르Louvre에 있던 이 거지소년,
아마도 그 ‘깨끗한’ 건물 통틀어 이를 잡고 있는 존재는 이 녀석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The Young Beggar(Lice-Ridden Boy), 1650, Louvre
(무리요는 ‘작품 관리’를 하지 않아, 제작년도는 거꾸로 주문대장을 바탕으로 한 막연한 추정일 뿐이라고... )
그런데 거지는 뮌헨에도 있었다.
Beggar Boys Eating Grapes and Melon, 1645 Alte Pinakothek
또 거기엔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 과일 팔러 나온 아이들도 있었고.
The Little Fruit Seller, 1670 Alte Pinakothek
이 그늘없이 천진난만한 표정들에 반해,
피나코텍 나올 때 현관 홀에 있는 사진매점에 들려,
이 아이들을 데려와 예쁜 틀 속에 앉혀 아이들 방에 걸어놨었다.
(지금은 실리콘 밸리 어느 방에 걸려있을까.
'하찌'하는 동쪽에? 아니면 이제 다 큰 아이들 그 서쪽에?)
거기엔 또 한 장이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연출의 이 사실적 묘사.
형들 놀이엔 관심없는 아이, 그 아이 입에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 쳐다보고 있는 저 개, 꼭 우리 뚝틀이 모습.
Young Boys Playing Dice, 1675, Alte Pinakothek
무리요의 ‘아이들’은 꼭 프랑스나 독일 이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삐체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의 에르미따쥐Эрмита́ж엔 뚝뚝이에게 미소 짓는 소년이 있었고,
Boy with a Dog, c.1655-60, Hermitage
마드리드의 프라도Prado에서는, 놀랍게도, 천사들과 양 사이에서 ‘아기 예수’께서 ‘아기 요한’에게
Infant Christ Offering a Drink of Water to St John, 1675-1680, Prado
(때로는 그냥 ‘Children with Shell’로 불리기도 한다.)
내 비록,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는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이 아이는 아직 못 만났지만,
Peasant Boy
이렇게,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반가운’ 모습들을 만나곤 하는 것, 이것 역시 박물관 순례의 묘미다.
무리요는 아이들을 끔찍이도 좋아했다. 열네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나서 그런 것일까? 정말?
일찍 부모를 여읜 무리요는 한 때 고아처럼 어려운 시절도 겪었었다. 그런데 말년에도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당시 그의 명성과 지위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 수입의 대부분을 자선 일에 쓰곤 했기 때문에 그럈던 것.
그래서 떠오르는 생각,
역사에서는 그때를 스페인황금기라 부르지만, 천연재해야 어쩔 수 없는 일,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던 그 시대,
貧民救恤의 필요성을 깨우쳐주려는 무리요의 호소가 이 그림들 속에 스며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제자와 추종자도 많았고, 스페인과 그 제국전역에 그림이 복제되고 모방되어 퍼져나갔다는 이 聖畵 화가가 그린
먹을 것 입에 넣고 있는 아이들 모습 보면서 그냥 한 번 해본 생각.
꼭 ‘아이들’뿐만은 아니다. National Gallery of Washington로 돌아온
탕자의 이 표정, 또 그를 반기는 아버지의 이 표정은? 거기에 또 저렇게도 좋아하는 뚝이....
그리고 인물 배경 배치 또 이 구도는?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7-1670 , National Gallery of Washington DC
‘생생한 아름다움’에 곁들여진 ‘편안한 표정’ 그 때문에 무리요의 그림은 보고 또 보게 된다.
역시 탕자 그 동네에 같이 걸려있는 이 모습.
(평생 ‘저속한’
또는 ‘저속하다고 오해될 수 있는’ 그림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
하지만 그도 역시
당대의 다른 화가들처럼
창녀들을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측이다.)
Two women at a window, 1655-1660,
National Gallery of Washington DC
자화상은커녕 초상화 그리기조차 꺼려했던 그, 그런 그가,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자기 얼굴을 그렸는데,
이 그림 밑에 보이는 글의 뜻은 이렇단다.
“Bart. Murillo portraying himself to fulfil the wishes and prayers of his children.”
거리감을 없애려 그랬는지
무리요는 여기서
트롱플뢰이유Trompe-l'œil라는
눈속임 기법을 썼다.
틀 밖으로 나온 손의 위치,
자식들과 한 방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물론 지금은 후손들과 떨어져,
런던에 온 사람들을 맞고 있지만.......
Self Portrait, 1670-3, National Gallery, London
물론 그는 聖畵 전문가였다.
여기 이 聖家族 그림은 어떤가. 손에 들려있는 새, 앞에서 한 발을 들고 있는 뚝디, ‘엄마’ ‘아빠’의 표정,
라파엘로나 다빈치에서보다 훨씬 더 가족적인 평화로움과 따스함이 느껴진다면, 꼭 내 그렇게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The Holy Family with the Little Bird, 1650, Prado
조셉 타운센드가 ‘무리요 작품 중 가장 매혹적’이라 평했다는
‘순례자들에게 빵을 건네주는 아기 예수’의 이 모습은 또 어떤가.
The Infant Christ Distributing Bread to Pilgrims, 1679, Budapest
무리요는 참 가정적이었다. 부인과 딸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 둘을 모델로 해서 그린 이 두 그림,
엄숙한 聖畵라기엔 참으로 편해 보이는 표정 아닌가?
Madonna and Child, 1638, Florence
The Virgin of the Rosary, 1642, Prado
세비야에서의 스승 Juan del Castillo의 보수적 화풍을 이어받은 초기작품들이란다. 여기에서도 그렇고,
그 이후 그의 바로크 양식 종교화에서도 그렇고, 그의 그림의 매력은 聖스러움보다는 아름다운 생명력이다.
‘성모승천’ 1.5m x 2m의 이 그림 역시 뚝틀이에게 소년이 미소 짓던 에르미따쥐 박물관에 걸려있었다.
대담한 붓놀림 화려한 색채가 연출해내는 ‘부드러운’ 입체감, 그리고 거기에서 묻어나는 아름다움.
La Asunción de la Virgen, c 1680, Hermitage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 얼마 전에 그린 ‘두 삼위일체’라는 독특한 형태의 이 그림은?
The Heavenly and Earthly Trinities, 1675-82,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아이들’ 위주로 살펴보다, 그냥 끝내기 아쉬워, 그의 삶에 있어서의 중간이정표를 간략히 정리해본다.
1618년, 안달루시아지방 세비야Sevilla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주 어렸을 때’ 부모 다 저 세상으로...
(24-27세 또 40-42세 때, 두 번의 마드리드 생활을 제외하곤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냈다.)
세비야에서, 스승 까스띠요Juan del Castillo로부터 당시 유행하던 플랑드르 양식을 익혔다.
1642년, (기록이 없으니 조심스런 추측만...) ‘고향 선배’인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를 만났을 것이며,
그를 통해 왕궁에 소장되어 있는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작품들을 연구했을 것이다.
1645년, 다시 돌아와 세비야 수도원에 13폭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 ‘이름을’ 얻었다.
1658년, 2차 마드리드 여행
1660년, 돌아온 후, 세비야에 미술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그 후 20년 동안 여러 중요한 주문을 받아가며, 웅장한 규모의 극적장면들을 묘사했다.
1682년, 까디스Cadiz에 있는 카푸친 수녀원의 벽화 ‘성 까따리나의 결혼’ 작업 중 발판이 무너지면서 떨어져,
세비야로 돌아와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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