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택광의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뚝틀이 2013. 4. 27. 10:53

요즘 나의 일과인 그림산책 중 느끼는 점 하나.

‘책에 인쇄된’ 그림들과 ‘모니터에서 빛나는’ 그림들의 ‘인상’이 얼마나 다른지 하는 것. 아니 또 하나 있다.

이건, 말하자면, 지금까지 봐왔던 그림을 한 번 더 보는 ‘지식’ 차원의 작업일 뿐, 박물관 그림 앞에 서서 보는 ‘감상’ 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이렇다. 모네Claude Monet의 ‘카푸신 거리’ 그림이다.

‘인상적’인가? 혼자 묻고,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Boulevard Capucines, 1873

 

검색엔진에서 모니터에 잡힌 이 그림. 이 상태에서 보이는 길거리의 사람들로부터 받는 느낌이...

                                                위 그림의 부분 확대

 

사실 우연히 고해상도 그림을 잡았다 보게 된 그림이지만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고해상도 그림 찾아 ‘부분’ 들여다보기.

마치 내 야생화 사진 또 별 사진 찍었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는 크로핑 작업이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확대사진’이요, 비유하자면 전시실 그림 앞에 서서 더 가까이 가 들여다보는 식이다.

(어딘가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림에 너무 가까이 고개를 디밀었다가 경보음이 울리고 경비원이 달려온 적도 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니 갑자기 다시 박물관 여행을 떠나고 싶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당연히 파리.....)

 

‘전체적 개관’과 ‘세부 느낌’을 나란히.... 내친 김에 다른 그림 또 하나. 마네Édouard Manet의 ‘발코니’다.

                                        balcony, 1869

 

역시 마찬가지로, 좀 더 들여다보면,

                                                           balcony, 확대그림.

 

아하! 이 여자가 한때 마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모리조Berthe Morisot.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Berthe Morisot with a Fan, 1874

 

이 모리조의 그림 두 점.

                     Peasant Hanging Out The Washing, 1881

 

그녀는 이 그림의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

                  Eugene Manet and His Daughter, Julie, in the Garden, 1883

 

모리조 역시 인상파 중요 화가 중 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된다. 원래 마네는 인상파 화가들과 묶여 이야기되는 것을 싫어했고, 그들과의 교류도 꺼렸었다. 그런데 이 모리조가 나타난 것. 미국에서 활동하다 파리에 와 ‘살롱 전’에의 출품경력도 있는 ‘기성화가’인 그녀는 마네의 화풍에 반해 그의 모델로 ‘취업’해 그림을 배우던 중. ‘인정받는’ 화가경력에 미모, 그녀는 사교계의 중심이었고, 인상파 화가들이 그녀를 ‘전시회’에 끌어들였고, 그래서 마네도 그녀에 끌려 할 수 없이 거기에 합류하고...

 

어~, 내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 읽은 적이 있는데.... 아하! 지난번 보기 드물게 좋은 책이란 인상을 받았던 이택광 교수의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http://blog.daum.net/wundervogel/6006343) 거기에서. 그 책을 다시 꺼내든다. 그때는 ‘그저 읽어나갔지만’ 이번에는 이 책을 ‘가이드 북’으로 삼아 그림들을 일일이 검색해 가면서(물론, 작가에 대한 자료검색도 곁들여 가며).... 그렇게 진행하다보니 이제 책 순서 또 내용과 ‘거의’ 상관없이 쓴 ‘내 식의 인상파 이야기’가....

 

우선, ‘인상파’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 상황 이해가 필수.

당시 파리는 만국박람회 계기로 오스망의 주도하에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그 자리에 대로를 형성하느라’ 시 전체가 온통 재개발 열기에 휩싸여 있었는데, 화가는 인기직업에 속했고, 모델 지망생들은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미술전람회 ‘살롱 전’은 나폴레옹 3세도 직접 나와 관람하고 시상할 정도로 중요행사였다. 문제는 그 당시 ‘바람직한’ 그림이라 여겨지던 것은 이런 스타일.

             Antoine Jaen Gros의 Bonaparte Visiting the Plague Victims of Jaffa , 1804

 

이러니, ‘아방가르드’로 인식되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이 ‘Paris Salon’에의 문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할 수 없이 그들은 ‘살롱’에 대항하는 전시회exhibition of the Salon des Refusés를 열곤 했는데,

1872년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가 모네의 ‘Impression, Sunrise’란 그림.

                                                           Impression Sunrise, 1872

 

이를 본 비평가 Louis Leroy가 신문에 실은 악평, 벽지초안보다도 못한.....

          "A catastrophe seemed to me imminent, and it was reserved to M. Monet to contribute the last straw. ...

           What does the canvas depict? Look at the catalogue. "Impression, Sunrise".

          "Impression--I was certain of it. I was just telling myself that, since I was impressed,

           there had to be some impression in it...and what freedom, what ease of workmanship.

           Wallpaper in its embryonic state is more finished than that seascape."

 

그 평론의 제목이 ‘Exhibition of Impressionists’이었고, 그래서 그 후 사람들은 이들을 뭉뚱그려 조롱조로 ‘인상파’라 불렀고... 전시회 입장료를 돌려달라는 관람객은 그래도 양반 축에 속했다. 교외에서 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 ‘성의 없게 그리는’ 태도에 분노를 느껴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그림을 못 그리게 훼방까지 놀 정도였으니.....

 

예술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 하지만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이들. 부유한 집 자제는 그래도 형편이 나았으니

그 중 하나가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 가업계승을 거부하고 화가의 길에 들어선 그의 화실은 일종의 아지트.

                                              The Artists Studio -9 Rue de la Condamine, 1870

 

이젤 앞에 선 마네, 그의 뒤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모네, 왼쪽 계단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밀 졸라, 앉아 있는 르누아르. 이젤 오른쪽 키 큰 남자 바지유는 나중에 마네가 직접 그려 넣었다고 함. 이들은 다 바지유에게서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하지만, 어쩌랴. 이 바지유에게도 먹을 것이 떨어져 콩만 삶아 먹은 적이 있었다고 하니.... 그러다, 운명이란 것은... 바지유 이 사람 이 그림을 그린 후에 보불전쟁에 나갔다가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전사.   

(普佛戰爭 Franco–Prussian War(1870–1871)은 인상파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사건.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Otto von Bismark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려 일으킨 전쟁.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Wilhelm 1세가 초대 독일제국 황제로 추대함. 프랑스가 독일에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기는 치욕을 겪은 것이 이때. 나폴레옹 3세의 무능에 질린 민중들이 처음 세운 사회주의 자치정부가 파리코뮌Paris Commune or Fourth French Revolution. 비록 두 달 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 진압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이....)

 

마네를 인상파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한다면 ‘아버지’ 같은 존재로 인상파 화가들을 이끌어주었던 사람은 피사로Camille Pissarro,

하녀와 결혼한 ‘죄’로 집에서 내처지고(하지만 그녀는 화가들 세계에서 내조의 여왕으로...),

하도 일거리가 없어 그림을 타일로 구워 판매하기까지 해봤지만(내 그때 거기에 살았더라면?)....

할 수 없이 밭에 버려진 감자를 주워 겨우 연명해가며....

                                 Orchard with Flowering Trees, Spring 1877

 

                                                            The Wheelbarrow, Orchard 1881

 

과묵한 그를 가장 잘 따르던 제자는 세잔느Paul Cézanne. 하지만 이 세잔느는 사실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도 괴짜.

                                 세잔 자화상 1875

 

나중에 고갱이 이 집에 합류하자, 세잔느와 고갱은 견원지간으로.

(주식 중개상을 하며 번 돈이 좀 있었던 고갱은 세잔느의 그림을 구입하는 등 나름 애써보지만...)

여기 이 피사로의 집에 모이는 화가들에게 일종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고흐가 남긴 초상화로 유명해진 의사 가셰Gachet.

    고흐가 그린 Paul-Ferdinand Gachet의 초상화, 1890

 

이 그림이 맘에 든 가셰가 자기에게도 하나 그려달라고 해, 현재 두 버전이 있음. 현 오르세 박물관에 있는 것은 가족이 그곳 ‘고흐 室’에 기증한 것. 또 하나는 이 그림이 그려진 지 꼭 100년 후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7,500만 불(일설에 의하면 9천만 불)에 팔리는데, 이 그림을 산 사람은 일본인 사이토료헤이斎藤.(당시는 일본 땅을 팔면 미국 땅을 다 살 수 있다고 할 정도의 거품 시대) 그는 자기 골프장 이름을 빈센트라 할 정도로 고흐의 팬. 이 그림 구매 후 그의 사업은 내리막길, 그리고 그의 죽음.

 

物主역할로 시작해 동료화가로 합류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원래는 부유한 수집가였지만 마네의 권유로 합류. 그와 드가가 ‘전시회’를 주관. 하지만,

굶어죽을 수야 없다며 ‘살롱’과 ‘전시회’ 양다리 걸치기도 허용해야한다고 대드는 세잔느 마네 시슬리 등과 끊임없는 의견충돌로...

오직 한 사람 정체성을 이유로 굳건히 소신을 지킨 사람이 드가.

 

일종의 ‘카메라 기법’을 연상시키는 카유보트의 그림 셋.

                          The gennevilliers plain seen from the slopes of argenteuil, 1888

 

                                          L'Yerres, pluie, 1875

 

                                                      Villas at Trouville, 1884

 

드가Edgar Degas, 그는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3세 때 부친 사망 후 어려움을 겪다, 법학도 시절인 22세 때 마네를 만나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타협을 모르는 철저한 완벽주의자 그는 “예술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지 천재적 영감의 표현이 아니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곤 했다.

                                            L’Absinthe, 1876

 

얼굴 부분. 압생트(중독성이 있는 싸구려 술)에 취한 이 남녀의 게슴츠레한 눈과 표정, 정말 리얼하지 않은가?

                                              표정 확대

 

드가가 즐겨 그린 스타일 그림 중 세 점.

   

                  The Star (L'Étoile), 1878                                    Miss La La im Zirkus Fernando, 1879

 

                                     The ironing women, 1884-1886

특히 이 마지막 그림은 피카소에게 강렬한 느낌을 주어, 그도 이와 비슷한 구도의 다림질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여성을 혐오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낸 드가를 사로잡았던 유일한 여인은 커새트Mary Cassatt. 이 여자도 평생 독신.

일설에 의하면 ‘경제적 무능력자’ 드가가 ‘부유한 집안’ 그녀에게 감히 청혼할 생각도 못했다 하기도 하고...

  

   Portrait of Miss Cassatt, Seated, Holding Cards, 1884

 

그녀 역시 인상파에서 영입한 ‘전시회’ 그룹의 멤버.

The Child's Bath (The Bath) by Mary Cassatt, 1893

 

‘성의 없는 그림’이라는 인식은 그렇다 치더라도, 판로의 관점에서 또 하나의 문제.

누가 이런 술 취한 사람들이나 당시 개념으로는 하류계층 사람들의 그림을 ‘비싼 돈’ 들여가며 사들이겠는가.

귀족들? 아니면 귀족들이 ‘고상한’ 그림 사는 것 그 흉내 내기에나 급급했던 부르주아지?

장 베로의 ‘샹젤리제 거리의 모자 장수’ 역시 마찬가지.

당시 파리의 모습 이 ‘그림’은 좋지만, 누가 ‘이런 여자’를 방에다....

             Jean Béraud, The Milliner on the Champs Elysées, 1888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사람은 모네, 가족의 승낙 없이 카미유와 결혼 후 친척들이 보내오던 후원금마저 끊어진 그, 화상에게 가불받고, ‘아무에게나’ 손을 벌리던 ‘댄디’ 그.

        Camille Monet on Her Deathbed, 1879

 

그의 곤궁을 보다 못한 까유보뜨가 사준 정원 그림.

(그래서 갑자기 생활이 여유 있게 되었다니, ‘그림 값’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The Lunch, 1876-1877

 

‘쓸데없는 소리’들이나 늘어놓는 비평가들에 대한 반발로

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로 가득한 ‘분위기’를 표현하려 그린 연작 ‘라자르 역의 풍경’ 이 그림들이 그에게 결정적 행운을 불러왔으니...

기차는 당시 ‘문명’ 또 ‘새 세상’의 상징, 그 모습에 매력을 느낀 어떤 이가 나타나 이 시리즈 전부를 사들였고....

                                        saint-lazare train station, 1877

 

                                   saint-lazare train station, 1877

 

여유를 얻은 모네, 이제 ‘가난한 화가’들과 떨어져, 또 ‘팔리지 않는 그림의 전시회’와도 거리를 두고,

‘관광객의 시선으로 고향을 보는’ 자기만의 그림 스타일을 찾아...

                                                      Clifftop Walk at Pourville, 1882

 

                                               Cliffs and Sailboats at Pourville, 1882

 

모네 말년의 포플러 시리즈. 이때는 이미 그의 이름이 알려져,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경매에 붙여지기까지.

                                 Poplars on the River Epte, 1890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이 사람은 인상파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

귀족들에게 불려가 초상화를 그리곤 하는 그를 세잔느는 노골적으로 경멸. 하지만 이 르누아르 역시 ‘자기 그림’을 그리려...

                                             Bal du Moulin de la Galette, 1876

(이 그림의 장소가 상징적. 보불 전쟁 후 파리코뮌 본부가 여기였었음. 이 그림 어디에서도 대학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그는 항상 부르주아의 ‘여유’가 부러웠던 사람. 이 그림 ‘선상 파티에서의 점심’의 분위기가 그런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1881   

‘장면 연출’만 그렇고, 사실 여기 그려진 사람들은 다 그의 친구들. 말하자면 일종의 초상화 모음.

그중 강아지를 데리고 노는 여자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되는 Aline Charigot이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까유보트.

  

인상파라고 꼭 프랑스 화가만 있었던 것은 아님. 시슬리Alfred Sisley,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평생 프랑스에서 산 영국인.

원래 집이 부유했으나 가세가 기울며 생계가 어려워져, 견디다 못해 살롱 전에도 응모했지만, 탈락의 고배. 배신자로 낙인찍힘.

극심한 우울증.

                                      A Path in Louveciennes, 1876

 

마네의 그림, 말도 안 되게 야만적이라는 혹평을 받은 '올랭피아.'

                                                                Olympia, 1865

 

계속 병마에 시달리다 죽는 순간까지 썩어 들어오는 다리를 움켜쥐고 그린 그의 마지막 작품. 50세.

                                               The Lilacs, 1883

 

마네의 죽음 후, 인상파 화가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괴팍한 성질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던 세잔느Paul Cézanne도 독립.

그가 새로 개척하는 영역이 바로 표현주의.

여기 이 마르세유 바닷가 모습의 채색, 다른 화가들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The Gulf of Marseille Seen from L'Estaque, 1882-1885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점을 찍듯이 그려나가는 점묘화법을 선보이기 시작하고....,

                                              Pear Trees And Flowers At Eragny,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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