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
험한 곳에 씨가 떨어지고,
겨우 고개를 내밀었는데, 가뭄에 비틀어지고,
세찬 비에 하필 그곳 흙이 파이며 물에 쓸려 내려가고,
그래도 견디고 잘 크네 했는데, 누구에게 뜯기고 부러지고,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 모든 일들.
인간이라는 동물이라고 다르겠는가.
유전자 로또의 행운도 없고,
각종 재앙 험한 환경 속에 시달리고,
그래도 나름 잘 꾸려나가고 있다싶었는데 갑작스런 어려움에 휘청!
이어, 꽈당! 모든 것이 와르르!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운명 앞 내 모습!
그런데, 잠깐!
그래도 이 세상은 나무와 풀로 뒤덮이고,
동물들이 인간들이 그 속에서 아등바등 우글거리고 있다.
생명체 그들. 그들 삶에 있어서 운명이란 무엇이고 禍란 무엇일까.
전혀 상상치도 예상치도 못했던 삐끗함?
그런데,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필연이요,
고뇌와 고통 역시 본질적으로 당연한 삶의 일부분이 아닐까?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 그 역시 자연세계가 정리되는 당연한 현상 아닐까?
꿈이란 무엇인가.
머릿속에 한 번 그려보았던 ‘바람직한 그림’ 그것일 뿐 아닐까?
세상 어떤 일도 그렇듯, 생각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 힘든 법.
꿈 역시 자기가 아는 세계에서 자신의 생각범위에서 나온 것이고,
그곳을 향한 길 역시 그 범위에서 나온 그림이다.
그것이 완벽한 이정표일 수 있을까?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는 무엇인가.
그런 것을 판단하는 잣대는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사람’들이 이루어온 ‘타협의 누적결과’ 모습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절충되어 지금의 모습이 이루어졌을 뿐,
당위성 합리성 그런 것은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禍라는 것은 그 이정표를 따르던 도중의 틀어짐.
그런데, 그 화는, 혹, 어쩌면 이번에도 운 좋게 넘어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너무 늦게, 너무 험하게, 맞닥뜨려야 했을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사실, ‘틀어져버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난 날 그 누구도 오늘의 이 모습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듯,
오늘의 그 누구도 앞으로의 세상 모습을 정확하게 미리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내가 그리던 성공그림 또한 확실치 않았던 것,
나중 ‘그 순간’까지 판단이 미루어져야한다.
계획했던 길에서 튕겨져 새로운 상황에 던져질 때, 그때,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각자 그들 나름의 꿈을 가지고 있고,
내가 가려던 길 아닌 다른 길로도 사람들이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에서 자신을 또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그리고 그 새 길을 더 신중하게 걸어가게 된다면
이것은 禍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 아닐까?
이것이 바로 轉禍爲福의 원리다.
후회한다고 어제가 달라지지 않고,
걱정한다고 내일이 밝아지지 않는다.
좌절하지 않고 더욱 활력을 살리는 것,
그러기에 거친 환경에서 피는 꽃이 더 아름답고,
그러기에 험한 곳에 둥지 튼 동물들의 능력이 더 뛰어난 것 아닐까?
존경 받는 사람들의, 진정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점 한 가지는
그들은 어떤 역경도 축복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老松의 구부러지고 휘어짐, 그 아름다움이
바로 역경의 이력서요, 전화위복의 산 증거들이 아닐까?후회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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