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뚝틀이 2009. 1. 1. 19:57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어떻게 하다가 책을 주문하게 되었고, 눈앞에 놓여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읽기 시작하였다. 편식 대신 건강식을 택하는 그런 마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옛날 서부영화에 나오는 퀘이커 교도들의 그 근엄한 생활과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가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 어디 저자의 ‘궤변’에 깔려있는 함정이나 한 번 찾아볼까하는 그런 비뚤어진 호기심에서라고나 할까.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다. 프로테스탄티즘. 말이 쉬워 그렇지, 개신교의 발생과 그 분파발전과정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상태로 그냥 저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할 수 없이, 이해가 전혀 안 될 때마다, 인터넷에 들어가 칼뱅과 웨슬리, 또 루터교와 장로교 청교도 침례교등의 배경, 또 영국 독일 미국의 당시 시대상황을 ‘공부’해 가는 수밖에.
 
그렇다. 사실 옛날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아니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든, 과학과 문명 또 기술이 있었고, 또 당연히 물질에 대한 욕심 역시 있어왔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오직 서구에서만 과학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고, 또 그러기에, 서구에서만 ‘가사와 사업의 분리’ 또 ‘합리적 부기 제도’에 힘입어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현상이 생겨났다고. 그는 이 서구 특유의 현상을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라는 표현으로 다른 문화권에서의 ‘비합리적이고 투기적 성격’과 구별한다.
 
베버는 이 책(원래는 두 편의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왜 당시 독일의 자본소유자 경영자 숙련노동자등 산업인력의 주축부분에서 프로테스탄트 인구비율이 현저히 높은가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베버는, 얼핏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는 해석, 즉 금욕적 성격이 강한 카톨릭은 세속적 재물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식의 견해를, 당시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은 카톨릭보다 훨씬 더 비세속적이었다는 이유로, 일축하고, 그 근본이유를 순수한 종교적 관점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다른 어떤 시점에서도 노동이 Beruf(독일말의 ‘직업’은 ‘부름 받음’이란 뜻으로 글쎄 우리말로는 ‘소명’이라고나 할까)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에서 이 ‘직업’에 대한 새로운 에토스가 생겨났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즉 노동이 신성하면 그 대가인 돈도 신성하다는 것. ‘자본주의 정신’이란 이 ‘직업’ 즉 ‘체계적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다.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축적되거나 낭비되지 않고 철저히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돈이라야 바로 이 ‘자본주의 정신’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루터의 직업관 즉 ‘직업노동은 이웃사랑의 외적표현’이고, 따라서 ‘노동의무를 다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그런 생각을 베버는 힘과 운명에 복종하라는 카톨릭 쪽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평가하고, ‘예정론’의 칼뱅주의를 네덜란드 프랑스 또 영국 자본주의의 동인이라고 주장한다. ‘예정론’(나 개인적으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고차원적’ 교리이지만)에 따르려면, 일단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직업노동’의 명령에 따르며,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거부함으로써 구원에의 확신을 얻게 되는데, 바로 이 soli Deo gloria(모든 것이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하여)의 절실함이 칼뱅주의 힘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베버의 평가다.
(수도사들은 금욕적인 방법의 삶았고, 금욕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그들은 더욱 더 일상생활에서 멀어져 갔지만, 칼뱅주의는 세속적 직업생활 안에서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금욕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세속 직업에 열심히 일하게 된다. 루터교에서는 ‘상실된 은총’을 참회를 통해 언제든지 다시 찾을 수 있으니 칼뱅주의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동인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즉 칼뱅주의의 예정설만이 매우 탁월한 심리적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어지는 경건주의, 웨슬리, 청교도주의,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교로 이어지는 베버의 이야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읽기만 했을 뿐이다. -
 
책의 후반부는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내용이다. 베버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기본사상과 경제적 일상생활 사이의 관련성을 청교도주의의 대표적 저술가 벡스터의 저서를 바탕으로 풀어나간다. 백스터가 죄악시한 것은 화폐와 재물에 대한 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재산을 갖고 휴식하는 것’과 ‘부를 향락하며 태만과 정욕에 빠져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이탈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노동’은 단순히 금욕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도 신이 지정한 ‘삶의 목적’이다.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괜찮다.’ 즉 벡스터에 따르면 ‘직업의무의 행사’로서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명령된 것이기까지 하다. “영주의 고상한 방종과 벼락부자의 과시적 허세는 모두 금욕주의가 증오하는 것이지만, 정직하게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는 윤리적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이상과 같이,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 기독교적 금욕정신에서 탄생한 것임을 증명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신에게 봉사하는 부의 추구에서 긍정적인 요인만을 보았던 것은 아니고, 가장 경건한 퀘이커 교도나 감리교인 사이에서조차 재산이 증대되면서 욕정과 자만 또 교만함에 빠지는 현실이 있음을 지적하고,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지만 그 정신은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정신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라는 '최후의 인간'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글을 맺는다.
 
책을 덮으며 마음이 착잡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미국의 신자유주의 아니 정글자본주의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근본이 뭔지 큰 틀이 뭔지 그런 생각은 이미 허황된 사치가 되어버리고 탐욕과 공포의 혼란 속에 갈기갈기 찢어져버린 우리의 모습이 담긴 어지러운 그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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