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의 소설 ‘완장’의 장면이 떠오른다. 할일 없이 빈둥대던(사실은 최사장 저수지에서 몰래 고기 잡아 팔던) 종술이란 주인공이 최사장의 저수지를 지키는 감시원 일자리를 얻게 되는데, 낚시하던 사람들이 그가 나타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 하는 것이 자기가 찬 완장의 힘인 줄 알고, 그 완장의 힘으로 마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다가, 급기야 최사장 일행의 낚시질까지 금지하려 옥신각신하기에 이르고, 결국 그 감시원 자리에서 쫓겨나는데, 상황판단을 못한 종술이 ‘죽어도’ 완장을 내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의 장면 장면 말이다.
요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람들 일하는 것을 보면서 꼭 종술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완장의 힘이 본래 영역을 벗어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젠 아예 주인인 국민을 계도하려는 그 사람들. 어쩌면 그렇게 완장의 종술 수준인가.
외래어 오렌지와 외국어 프렌들리조차 구별하지 못한다는 지엽적 문제를 들먹이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썰렁한’ 이야기는 한번쯤 있을 수 있는 실수라 봐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그 인수위원장과 일국의 대통령 당선자가 ‘굿모닝’이니 초등학교학생도 아는 영어니 하며 농담조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꼭 우리 국민을 우습게 여기며 코미디를 벌이는 것 같아 치솟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영어교육에 앞으로 5년간 4조원을 투입하겠다는 이주호위원의 말에선 비애를 느낀다. 설령 그가 교육과학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렇게 예산규모까지 못 박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2007년 교육부가 대학의 경쟁력을 높인다고 투입한 두뇌한국(BK21)사업의 총규모가 3000억원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4조원을 수학과 과학교육에 투입하는 것과 영어에 투입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국가경쟁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까 생각한다면, 또 꼭 영어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중 일부라도, 중국어 아랍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의 다른 외국어에도 분산시키는 것이 더 ‘전체적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면,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특정사업 내용에 깊게 빠져들어갈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가 꽉 막힌 완장요원들 같다. 더구나 인수위원장의 그 대학 테솔 사업까지 관련되어 있는 일 아닌가.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 매지 말라는 속담이 왜 생겼겠나.
어디 이번 영어교육뿐이랴. 대운하 사업도 정부조직 개편도 다 마찬가지다. 마치 입 닥치고 따라와 하는 완장요원들을 보는 것 같다. 국민을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섬기겠다던 당선자의 약속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번보다 더 득표율도 높았고, 득표수도 많았던 지난 정권 때도 주인인 국민이 이렇게까지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이번엔 단지 표차가 컸을 뿐인데, 마치 무슨 비상대권이라도 맡겨진 듯 살벌한 분위기다.
이제 서서히 이 완장부대에 대한 거부감이 분노로 변해가고 있다. 이미 이 완장부대의 장을 정해주기는 했지만, 이제 이 완장부대를 제어할 다른 완장부대를 뽑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주인 된 입장으로서 이제 푸른 기와지붕과 둥근 초록지붕 사이에 균형을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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