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무엇인가 심고 가꾼다는 것

뚝틀이 2009. 1. 1. 22:52
비가 온다. 아침부터 비가 온다. 하늘이 훤한 것을 보니 그저 잠깐 동안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밤부터 비 온다는 일기예보가 아직 남아있지 않은가. 금년 봄 가뭄은 유난히도 심하다. 겨울에 눈을 그렇게 많이 내려줬으니 좀 쉬어가자 그건가? 옥수수 싹 누렇게 변하고, 고추줄기는 서있기도 힘들어하고, 잡초만 때 만났다. 타들어가는 農心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농협에서 사온 옥수수 한 봉지. 이웃에서 가져온 해바라기 반 봉투. 욕심인가 관성인가. 미리 일구어놓은 밭으론 턱 없이 모자라, 곡괭이질 삽질 또 호미질에 아이고 팔이야 아이고 허리야, 받아온 약봉지 입에 털어 넣으며,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게 어디 수확만을 위한 것이던가. 이 녀석들 자라는 동안 변해가는 밭 모양. 그 시간그림을 그리는 거지.


작년에 뿌리내린 포도넝쿨 가꾸기도 마찬가지다. 이 녀석들. 저 위 한 번 올려다보고, 아 저기로구나, 또 옆도 한 번 둘러보고, 아 여기 여기에 가지 내면 되겠구나, 이런 눈치 하난 있을 법한데, 뱀 혓바닥 같은 순을 사방으로 내밀며 허우적거리는 폼이 이건 완전 구제불능이다. 어떻게든 도와주려 간격도 방향도 제멋대로인 줄을 매다보니, 이번엔 전체 그림이 엉망이 된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다 생각해낸 것이 이 녀석들 속성을 이용하는 방법. 좀 잔인한 듯싶지만, 작년에 애써 타고 올라간 굵은 줄기부분을 그 줄 채로 내려, 마치 오선지 악보 가로줄처럼. 옆으로 평평하게 끌어당겨 기둥에 묶어놓는다. 이제 어떤 음표 쉼표 그려 넣든지 그건 너희들 몫이라. 흉측하던 그림이 깨끗이 정리된다.


잡초로 작품을 만들려 애써본 적도 있었다. 집 주위 밭 옆 군데군데 적당히 잡초무리 남겨놓아 자연스런 그림을 만들겠다며. 하지만 인간취향에 맞춰 건드려 놓은 땅모양이라 그런지 도무지 어울리질 않는다. 결국 여름 내내 후회의 낫질. 하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그런 종류만으로 그림을 만들 수는 없는 일.


결국 비가 멈춘다. 오늘 밤을 약속하며. 옆으로 누워 힘들어하던 포도 잎들이 어느새 생기를 찾고 자리를 바로 잡았다. 누워서 보는 자세에서 다시 올려다보는 자세로. 어휴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지? 걱정 않아도 된단다. 햇볕가리개 그건 저 옆에서 기둥 따라 오르고 있는 다래들 몫이니. 너희는 그저 옆면에서 멋진 음악이나 만들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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