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함박눈

뚝틀이 2009. 1. 1. 22:45
잠자리에 들기 전 인터넷 신문을 보다 화들짝 놀란다. 화면 위쪽에서 넘어가곤 하는 도시별 날씨에 서울에도 눈이 오고, 춘천에도 눈사람이 그려져 있다. 설마 여기에도 눈이 오랴 하는 생각에 밖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리온도 황소도 또 평소엔 흐릿하기만 하던 플레이아데스와 하이아데스까지 총총하다. 그러면 그렇지. 하지만 맑은 날에 구름 몰려오면 그게 더 무서운 것 아닌가.

 

기상청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한 때 눈이나 비가 온 후 오후에 갠단다. 내 어디 한두 번 속았던가. 하지만 또 누가 아나. 며칠 동안 고생해 말리고 있는 그 보온덮개들. 이번에 눈 맞고 날 쌀쌀해지면 다 헛수고 아닌가. 부랴부랴 플래시 켜들고 비춰가며 차곡차곡 개어서 한 곳으로 모은다. 말이 편해 차곡차곡이지 얼음덩어리 그 큰 덩치들 어디 내 마음대로 접히고 움직이나. 끊어지는 것 같은 허리를 조심조심 일으킨다. 이마에, 아니 온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다. 다시 하늘을 본다. 여전히 총총.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작년 겨울 그 어느 날. 칠흑 같은 한 밤중 그 얼굴을 에는 듯 차가운 진눈개비 속. 질척거리는 짚단을 정리하며, 다시라곤 낭만 따윈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짐승 같은 소리로 울부짖던 그 새벽. 그러나 오늘은 마음이 편하다. 초승달이라도 떠 있으니 다행이고, 페가수스 사각형도 시리우스도 선명하다.

며칠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통증으로 고생했지만, 이 긴급작업에 그런 사치가 어디 있나. 원래 몸이란 것이. 편하면 편할수록 더 아이고 아이고하는 엄살쟁이 아닌가. 아드레날린이 한번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해지는 것이 바로 우리 몸 아니던가.

강희대제 한 페이지 펼쳤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잠에 빠져든다. 황토 집 좋은 점이 바로 이 잠에 빠져드는 느낌. 또 일어날 때의 상쾌함.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었다 생각은 되는데, 그냥 깨어난 것이 아니라, 누가 깨운 듯. 왜 이렇게 조용하지? 살며시 눈을 뜬다. 그러면 그렇지.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언제나 그렇다. 밤사이 눈이 온 날. 무슨 텅 빈 녹음실에라도 들어있는 듯 너무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 귀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사람이 만든 흡음제가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이 별 모양 솜털 눈송이들이 온 세상 소리를 빨아들이는 그 능력에야 어찌 비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곳은 사람이 만드는 소음과 거리가 먼 깊은 산골마을 아니던가.
밖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인다. 밤사이 눈이 오고 이제 그친 것이 아니라, 아직 눈이 오고 있다. 쌓인 눈의 양이 제법이다. 이런 눈에 집 속에만 있을 수야 없지. 세 친구와 함께 새벽산보에 나선다.

천방지축 뚝뚝이는 어쩔 수 없어 묶었지만, 뚝디와 뚝틀이는 자유다. 새벽 눈길. 사람의 눈이 얼마나 적응력이 강한지는 예전에 야간산행 다닐 때 익히 느꼈다. 캄캄한 밤중에도 플래시를 끄고 얼마 지나면, 길에 놓인 돌이나, 옆에 있는 바위를 알아볼 수 있어 걷기에 불편함이 없다. 하물며 오늘 이 하얀 눈 세상에서야. 세 친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신이 나 어쩔 줄 모른다. 뭐 개들이 색맹이고 눈이 모든 것을 정돈시킨 모양이라 눈을 좋아한다고? 그 무슨 해괴한 이론. 그렇다면 왜 풀밭에 가서도 그리 좋아하는가. 색맹이니 뭐니 하는 것 다 해당사항 아니고, 눈이 덮어버린 세상냄새가 달라져서 그런 것이리라. 소리가 잦아든 적막에 사람들이 신기함을 느끼듯이, 개들 역시 변해버린 세상냄새가 신기한 것이다. 사람에게든 강아지에게든 변화야말로 활력의 방아쇠가 아니던가.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눈앞에 仙境이 펼쳐진다. 이런 곳 마다하고 신선들이 어디 가겠는가. 이곳에 부임했던 퇴계 이황선생 좀 성급하셨다. 이곳 가을 단풍 하도 좋아, 금수강산에서 으뜸이라며 그 이름을 錦繡山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사실 그가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이 새벽공기 마시며 눈 속을 걸었더라면 白雲山이란 원래 이름을 건드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흩날리던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진다. 너 이제 집에 못가. 겁이라도 주려는 듯 얼굴을 때린다. 외투에 쌓인 눈이 젖으며 얼며 툭툭 떨어져나간다. 상쾌함.
낭만이란 무엇인가. 졸병시절. 산속 파견대에서 눈보라에 시달리던 졸병시절. 그때 그 시절엔 낭만이라 생각해본 적 없던 이 눈보라가 오늘은 아름다움이요 즐거움이다. 눈보라 점점 더 매서워진다.
강아지들 달려오는 소리에 놀라, 갑자기 푸드드드득 새들이 날아오른다. 보통 때라면 훨씬 더 미리 날아올랐을 텐데, 조금이라도 더 먹이를 찾아보려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눈이 좋은 일도 한다. 낙엽 밑에 있는 수많은 벌레들을 새들로부터 가려주고 보호해주는 것. 그 새들이 좀 가엽기는 해도, 그래도 이렇게 잠시나마 보호하며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닌가.

큰일이다. 갑자기 급한 마음이 든다. 할 일이 생각난다. 테라스에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얼른 손을 봐야지. 그 꽁꽁 얼어붙은 눈 흉한 모습 없애려 지난겨울 얼마나 고생했던가. 엇 저녁에 뭐라도 깔아놨으면 좋았을 걸. 이랬을 걸 저랬을 걸 무슨 걸 무슨 걸. 이제 와서 그 무슨 소용인가. 할 일이 생각나고 마음이 급해지는 그 순간 낭만은 날아간다. 증발해버린다.

서둘러 고갯길을 내려온다. 얘들아 너희끼리 놀아라. 우리 3뚝 친구에게 아침먹이 챙겨주고, 빗자루로 쓸고 눈삽으로 치워내며 집 주위를 정리한다. 하지만 쓸어도 치워도 별 효과가 없다. 눈발이 더욱 더 거세지며 다시 하얗게 덮어버린다.
집사람 놀라라고 아침 커피 끓이며 향내 피운다. 눈 속 시골 아름다운 행복을 만끽하라고.

'뚝틀이의 생각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리는 하나, 손가락은 열  (0) 2009.01.01
무엇인가 심고 가꾼다는 것  (0) 2009.01.01
이명박 정부의 완장부대  (0) 2009.01.01
Blind spot에서의 함정  (0) 2009.01.01
자동차 색깔과 조중동  (0) 2008.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