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이 학고개에 또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이 나리네♪,누♬운이♪나리네.”
초등학교 4학년 그 시절. 엄마와 단 둘이서 살던 나에게도 우리 집이 생겼다. 전쟁터에서 풀려나오신 아버지가 황량한 감자밭에 손수 지으신 우리 집. 놀랍게도, 5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다.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 느껴질 때마다 그 집을 가보곤 한다. 피난민들이 무단으로 점령한 그 동네가 철도청 땅이라 증축을 못한다지만, 이제는 사람들 걸어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 양쪽엔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서있다. 예전 그 피난민 동네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채.
볏짚 개어 넣은 진흙으로 벽을 치고, 천장엔 신문지를 발랐던 그 집 방 한 칸에 하숙생들을 받았다. 영환이 아저씨랑 여생이 아저씨. 광준가 나준가 무슨 갑부 집 아들들이라고 이야기 들었는데, 설마 그럴 리야. 그런 부잣집 아들들이 그런 집에 하숙을 들 리가 있었겠나. 어쨌든, 그 동네 집이라고 겨우 예닐곱 밖에 안 되었고, 어른들은 눈에 띄지도 않고 우리들만 뛰어놀던 그 동네에서, 그 서울법대 서울사대 아저씨들은 만날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피워댔다. 그 서울대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는 난 알지 못했고, 그저 기억나는 것은 방바닥 가득히 “못 살겠다 갈아보자” 빨간 글씨 써 놓고, 한 밤중만 되면 기어나가 신익희 선생님 대통령 입후보 포스터를 붙이곤 하던 그 아저씨들이었다는 인상뿐이다. 꼭 무슨 간첩질 하듯 절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나에게 무서운 눈을 하곤 하던 그 아저씨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아버지가 라디오를 들고 오셨다. 노란 쇳덩어리. 소리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그 속에서 나오는 사람 소리가 꼭 새들이 우는 소리같이 맑고 맑았다. “청실홍실♫ 엮어서” 노래가 시작되면, “눈이 나리네♪” 노래가 흘러나오면, 모두 그 앞에 모여 앉았다. 하숙생 그 아저씨들도 옆집 종복이 누나도 모두 그 좁은 방에 요리조리 끼어 앉는다. 우리 마을 유일의 라듸오. 당시는 라듸오요 잔듸밭이었다. 하필 꼭 그때면 그 미운 아저씨들 심부름을 시킨다. 담배 좀 사올래? 죽을힘을 다해 뛰어간다. 마을을 벗어나, 개울을 따라, 제재소를 지나, 역앞에 있는 담배 가게까지 갔다가, 담배 갑을 손에 들고 헐레벌떡 방으로 뛰어들면, 야 너 어제보다 되게 빨라졌다. 마라톤해도 되겠다하며, 싱글싱글 웃던 그 아저씨 그 누나. 참 종복이 누난 나중에 옆 동네 엄청난 부잣집 맏아들 태환이형에게 시집갔는데, 잘 살고 있겠지?
하숙생들이 떠나가고, 그들이 쓰던 방이 내 방이 되고 나선, 마을 사람들이 집에 몰려와 떠들 때, 그 라듸오는 내 친구였고, 보호자였다. 마치 백화점 입구의 에어커튼 같은 소음 차단막. 거기에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들었고, 우리는 구국의 일념으로 어쩌고 하는 박정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학이란 데를 들어가고 나선 최동욱의 ‘세시의 다이얼’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전해주는 내 친구였다. 졸병 때 제대말년엔 일부러 송신소 야간근무를 자원하곤 했다. 그 라듸오를 옆에 끼고, 극동방송 VONC에서 흘러나오는 브람스에 심취됐고 비에니야프스키에 녹아내리며, 내 노트엔 주제멜로디를 받아적은 악보가 쌓여갔다. 험악한 싸움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지만, 이 쇳덩어리 라디오는 끄떡없이 브르크너를 쏟아내었다. 제대를 하고 나오는 나에게 후배들의 간청은 뿌리칠 수가 없는 것이었고, 그 아까운 내 친구 라듸오는 송신소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복학한 후 텔레비전이라는 것이 집에 들어온 후에도 그 노란 쇳덩어리 상자가 한없이 그리웠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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