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져가는 몸을 추스르며 N은 생각한다. 연장이냐 시작이냐. 자연스런 귀결은 당연히 하나. 이제 끝을 내자. 이생을 끝내자. N은 산을 찾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렸을 적,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랬듯이, 괴로움이 쌓일 때마다 그랬듯이. 해가 진 다음이건 아직 짙은 어둠 속 새벽이건 상관없이 산길로 들어선다. 부대낌 없는 그곳으로 몸을 이끈다.
이번은 그때와는 다르다. 이젠 마음도 몸도 다한 상태다. 마무리 상태. 하지만 아쉬움이 전혀 없다. 극한상황을 만들어나간다. 평소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깊은 산 어려운 곳으로 마지막 한 방울의 기운까지도 짜내며 기어든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데도 N의 발은 움직여나간다. 마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앞을 향하는 병사처럼.
산행이 계속되며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니 점점 차갑게 모질어져간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 이생을 끝낸다는 것과 목숨의 끝내는 것이 동격은 아니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삶의 이해, 삶의 터전과 방식, 이것들의 새로운 시작이면 충분하다. 과거를 떠나자 떠나. 이제까지의 터전을 떠나자. 그래 인간을 떠나자. 이것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마감하자. 서울을 떠나자. 새로운 터전에서 새 삶을 시작하자. N의 발걸음과 눈길은 이제 빛깔을 달리한다. 새 터를 찾아 곳곳을 헤매던 N의 마음이 지리산 자락 몇 군데로 가닥을 잡는다. 하나는 깊고 깊은 산속이다. 사람의 숨결 그 흔적만이 남아있는 곳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강가다. 산이 아직 끝나지 않고 바다가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 중 하나다. 우선 세를 들어 살면서 어느 쪽을 정착의 장소로 정할지 곰곰이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삶은 부딪힘이 빚어내는 빛과 소리의 흐름이라 했었지. 옛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우연의 불꽃이 튕긴다. 자신보다 더 깊고 급한 어려움에 빠진 친구. 그가 도움을 구한다. 그 처절한 배신의 대가로 N이 받아 지니고 있던 그 액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그가 그 반대급부로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의 노후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터뿐이라는 것.
이야기가 나온 다음날 일찍 N은 눈 덮인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 그가 이야기해준 마을회관 앞 그곳을 찾는다. 검은 비닐이 사방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쓰레기더미가 여기저기 쌓여있는 황량한 그 곳에 고추를 키웠던 흔적이 보이고, 그 아래 계곡 쪽으로 백년도 훨씬 넘게 이곳을 지켜왔음직한 소나무가 이삼십 그루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화로 주변 모양을 설명하며 N은 이곳이 바로 그가 말한 곳임을 확인하고 또 한다. N은 생각한다. 이건 내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선물을 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나무 숲을 어디 가서 또 볼 수 있단 말인가. 도움의 마음이 계산으로 바뀌며 결정합리화의 과정이 끝난다. 바로 그 다음날로 매매절차가 끝나고, 새로운 터를 찾아 헤매던 N 마음의 방황에도 마침표가 찍힌다.
삶은 언제나 그렇다. 특히 나름대로의 계산으로 신중해야함을 무시했을 때. 그 즉흥적 매매는 N에게 또 하나의 아픔을 심어준다. N이 본 그 곳 노른자위 부분에 쐐기에 찔려있다. 자연스런 모자이크 밭 동네 가운데로 도로가 지나면서 남겨놓은 흔적이었다. 상황은 틀어졌다. 이 쐐기 모양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렵사리 만난 그 주인, 내 양보 없으면 당신 땅은 무용지물, 조롱조의 콧노래다. N의 마음은 다시 한 번 바닥 모를 낭떠러지로 떨어져간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지적도 한 번 떼어보지도 않고 매매 절차를 서둘러 마친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탓할 일이지.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 그 가까운 사람이 그 어려움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면, 가까운 사람에게 부탁했겠나. 언제나 마지막 수단은 가까운 사람에 기대는 것뿐이고, 바로 그 바턴을 이어받은 그 가까운 사람이 그때부터 다른 방법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고. 친구는 그 바턴을 이어받았었고, 이제 그 다음 주자로 N이 뽑힌 것이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 그것이 정공법이다. 온갖 수모를 무릅써가며 N은 결국 그 쐐기의 거래를 성사시킨다. 안도의 숨을 내 쉬며 N은 스스로를 타이른다. 삶이란 흐름엔 헤맴도 자연스런 일부라고. 또 헤맴엔 그 자체의 의미가 있다고. 지금까지의 삶이 그래왔지 않은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고. 이번의 부산물은 마을사람들과의 친화였다. 이번 과정에서 부딪치며 스쳐간 사람들과의 대화. 그것은 거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꿈을 향한 흐름에서 전화위복이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필연적 귀결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의 로마는 꿈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의 서울 역시 꿈이다. 꿈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음을 잊지 않기만 한다면, 다른 길로 다른 세계로 벗어난다는 것이 곧 나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다른 세계에도 삶이 있지 않은가. 또 그 다른 삶을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잘 아는 길을 벗어난 사람에게 호기심어린 관찰, 조심스러운 판단, 신중한 행동은 본능적 속성이다. 사람의 삶에서 예정에 없던 다른 길로 들어선다는 것. 그것은 때로 그 본래의 궤도에 남아있으며 의도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라는 웃음을 선사하는 것. 그것 또한 삶의 진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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