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개솔숲 이야기

c-3 마침표

뚝틀이 2009. 1. 18. 14:44

이제 미루고 미뤄왔던 일에 결말을 낼 차례다. 직장을 정리하고 떠나는 것. N은 평생 꿈으로 살아왔고, 그의 직장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 몸과 마음이 이토록 피폐해진 상태에서, 나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자리가 아까워 시간만 보내는 것, 그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젊은 피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그것만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결정이다.

 

그런 생각으로 필요한 결정을 내린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정작 사표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써지질 않는다. 우선, 보장된 정년을 앞당겨 포기한다는 것이 N의 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함께 물러나자고 요구하는 그런 상징적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생각방법이 있다는 것에 N이 놀란다. 오랫동안 공동운명체의 구성원으로 지내왔던 사람으로 할 일이 아니다. 두 번째 어려움은 억울함 때문이다. 일찍 젊은 피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는 것은 진정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슨 조직을 배반하고 나가는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각종 불이익이 안겨지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불이익엔 그저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연금까지도 대폭 삭감되는 그런 불이익은 정말 억울하다. 여기에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어려움이 더해진다. Mrs. N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일. 실직자의 아내. 남자는 열정으로 살고, 부인은 남편의 명함으로 산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 이유가 아름답다하더라도 명함이 없어진 남편의 모습이 자신의 일로 닥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공자님께 물어볼 수밖에. 중요한 결정을 행동으로 옮겨야할 때는 되었는데, 이제 몇 번 더 생각해야하는지.

“두 번, 두 번이니라. 한번 생각으로는 경솔하기 쉽고, 세 번에 이르면 이해관계에 얽매이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성적 결단. N은 이번엔 칸트선생의 도움을 청한다.

“오래 오래 생각해서 ‘합리적’ 결론 도출하겠다고? 글쎄..... 사람이란 어차피 어떤 일에 부딪히는 순간 이미 어느 결론에 도달해 있는 법. 오랜 생각이란 단지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몸부림일 뿐.”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짜생각이 무엇인지, N은 그 합리화 작업을 시작한다. 현대인답게 계산을 곁들여. 얼마 오래지 않아 N은 그 계산의 결과를 반려자에게 내보이며 동의를 구한다.

 

직장을 일찍 떠나는 대가로 치러야하는 경제적 손실, 즉 날아가는 연봉과 손해나는 연금 그 액수를 α라 하자.

무리하게 정년이 될 때까지 4년 더 버티느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악화된다면 정년 후 삼년은 살겠지. 물론 숨이 넘어간다는 그런 말은 아니고, 우리가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기간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지금 그만둔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 당장부터 제2의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고, 그렇게 4년 지내면서 심신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정년 후 3년이 아니라 6년은 더 건강하게 지낼 수 있으니, 10년을 얻게 되는 것 아니겠어? 이것이야말로 건강을 돈 주고 사는, 아니 행복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는 산 증거가 아니고 뭐겠어.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 왜 모르겠어.”

다른 반쪽 N의 대답에 이쪽 N은 이제, 드디어, 그 망설이고 망설이던 사표를 써 제출한다. 방에 가득한, 그동안 그렇게도 정들었던, 물건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N의 눈에 물기가 고인다. 다른 반쪽 N도 완전히 쇼크 상태에 빠져든다. 설마 하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무직자 남편. 그렇지만 N은 속으로 자유인 만세를 부른다. 이제 곧 면도를 하지 않아도 좋고,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은 자유인.

'학고개솔숲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c-6 혼돈 속 1004  (0) 2009.01.18
c-5 카오스 효과   (0) 2009.01.18
c-4 카프리치오소  (0) 2009.01.18
c-2 새 터전을 찾아  (0) 2009.01.18
c-1 삶 그리고 꿈  (0) 2009.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