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 또 신중. 준비는 신중할수록, 또 행동은 빠를수록 좋다지 않는가. 귀틀집이라는 것에 매달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린 지 벌써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실제 환경과의 타협이라는 다음 단계로 들어갈 때다. 그 솔숲에서 한 20분 떨어진 곳에 도시 흉내를 낸 마을이 있다. 병원도 있고 약국도 있고, 또 음식점도 있고 슈퍼도 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닌가. 부동산을 찾아 적당한 집을 골라서 계약을 하려하는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N의 친구가 달려와 절대불가를 외친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곳에선 도시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인데, 나올 때는 그렇지 못하다고. 속절없이 묶인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그냥 펜션이나 모텔에 묶는 편이 훨씬 낫다고.
싼 맛에 모텔에 몇 번 묵어보지만, 이거야말로 정말 찜찜한 노릇이다. 무슨 러브호텔에서 떳떳치 못한 짓하고 나오는 사람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좀 부담되더라도 펜션을 찾는다. 우연히 묵었다가 마음 통하는 주인아저씨와 친하게 되어 그곳을 단골로 거점으로 삼는다. 이 펜션과 현장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한다. 컨테이너를 하나 들여놓자. 사방에 수소문을 해 단열시공도 해 놓고, 전기장판까지 깔아놓은 중고 컨테이너 하나를 마련한다. 이제부터 여기가 야전사령부다. 정성이 있는 곳에 결과가 있다던가. 마을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횡재가 굴러든다. 마을회관을 쓰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물론 보증금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이층을 아주 싸게 세 줄 텐데, 단지 마을회관 전기료만 좀 내어주면 좋겠단다. 이렇게 좋을 수가.
시간이야 충분하지. N은 생각한다. 가진 것 시간뿐 아닌가. 건방지게 생각하면 귀신이 찾아온다 하던가. 마을을 오가며 그곳 사람들과의 교분을 쌓고, 면사무소에도 가끔 들려 그곳 생활 준비를 ‘여유 있게’ 시작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 벼락이 떨어진다. 바뀐 건축법 시행이 5월부터란다. 무엇이 바뀌었냐고? 5월 이후엔, 2급 이상 설계사가 작성한 도면을 제출해야 건축허가가 나고, 준공검사는 그 설계도에 따라 제대로 지어졌는지를 확인하여 내어준다는 것이다. 다들 아는 사실을 N만 몰랐던 것이다. 이거야 말로 큰일이다. 늦어도 4월엔 착공을 해야, 구 건축법의 적용을 받게 되어, N 자신이 만든 설계도도 인정을 받고, 집을 짓는 동안에도 설계를 변경할 수 있으며, 준공검사 또한 융통성 있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그러려면 토지형질변경 신청서류를 하루라도 빨리 접수시켜야하고, 거기에는 건축 설계도가 첨부되어야 한단다. 빨리, 빨리. 이런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제부터 어쩔 수 없이 빨리 빨리다.
우선은 알리바이 마련이 중요하다. 일단 구법의 적용을 받게만 해놓으면, 중간에 설계변경이 가능하다니, 지금까지 그려온 안A와 안B라는 두 개의 설계도면을 제출할 요량으로 측량설계 사무소를 찾아 의논을 한다. 어느 쪽이 더 적당하겠냐고. 그에게 돌아온 간단한 대답.
“둘 다 제출하시죠 뭐.”
그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이 ‘화근-전화위복-또 화근-또 전화위복’의 단초가 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쨌든, 토지개발행위 신청서를 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 쌓인 현장에 담당 공무원이 나온다. 마치 부동산 투기꾼을 잡으러온 포도청 관리들 같이 그들이 툭툭 내 뱉는 말이 N의 심기를 건드린다. 하긴 하늘같은 힘을 가진 공무원들에게 보통의 서민이 뭘 더 바라겠는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저 오케이만 해주시오 그 정도지. 어쨌든 그 사람들 N을 범죄자로 판단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보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허가가 떨어진다.
집을 짓는 데 허용된 시간은 2년이란다. 원칙적으로 1년 이내라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늦어진다는 사유서를 제출하면 1년 연장이 가능하다고 하니. 귀틀집을 짓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첫해에는 틈틈이 기초 다지고, 귀틀집에 쓸 나무도 미리 사두었다가 장마철에 비 흠뻑 맞게 하고, 나무껍질 벗기어가며 직장과의 인연 줄도 벗기어간다는 것이 N의 생각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착공이다. 실제로 착공 되었다는 것을 관청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때 비로소 구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 과도규정의 덕을 보기 위해서다.
기초공사를 시작하려, 카우보이 N이 앞집 이장 댁에서 꼬마 포클레인을 빌린다. 비록 면허를 딸 때 실습다운 실습을 해 보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포클레인 도사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다던가. 덜컹거리는 망아지 위에 올라앉아 왼손 오른손 당기고 돌리고 열심히 애써보지만 줄은 비뚤어지고 깊이는 들쭉날쭉. 정말 봐주기 힘들만큼 땅이 엉망으로 파헤쳐진다. 그래도 N의 얼굴에선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절묘한 타이밍. 마을에 공동하수처리시설공사가 시작된다. 비록 이미 오래전에 계획된 터라 N의 집은 그 공사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공동시설 공사는 좋은 것 아닌가.
그 작업 팀 중 포클레인 기사가 묵을 곳이 없다며, N이 세 들어 있는 마을회관을 같이 쓸 수 있는지 물어온다. 물론 N이 흔쾌히 응한다. 물론 비용은 분담이라고 미리 못을 박아놓고. N의 속셈은 그 분담비용만큼이라도 그를 포클레인 사부님으로 모시고 배울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 것이다. N의 호의에 감사한다며 그가 한마디 한다.
“사장님 일하는 것 낮에 보았는데요. 지금 하시듯 그렇게 엉성하게 줄기초 파면 나중에 인건비랑 공사비 만만치 않게 들어가게 되요. 차라리 통기초로 하시죠. 통째로 파내는 간단한 일이라면 제 일 끝난 다음 잠깐 해드리죠. 물론 무료는 아니고요.”
포클레인 다루는 법을 그 전문기사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배울 겸하는 생각에, 또 그 비용은 방 분담비용으로 충당될 수 있다는 계산 빠른 생각에, 옳다구나, 그에게 평탄작업을 부탁한다.
어떤 만남이든 흐름을 바꾼다. 나비가 브라질에서 어떤 바람을 일으키는 가에 따라 미국에 오는 허리케인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과장된 이야기에도 사람들은 거기에 붙은 카오스이론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물며 만남은 흐름을 바꾼다는 그 위대한 N의 이야기니 거기에 무슨 오류가 있겠는가.
그의 멋진 솜씨에 넋 나간 N이 감탄을 연발하는 사이에 바닥은 부탁했던 60전을 넘어, 90전, 결국 1미터가 훨씬 넘게 파헤쳐지고 있다. 날 어두울 때 일을 시작해 캄캄해 진 다음 헤드라이트를 켜고 일을 한 화근이었다. 어쨌든 다음날 아침 고무호스에 물 채워 수평을 재어보고, 가로세로 20미터 15미터 바닥에 깊이차이가 10전도 나지 않는다는 것에 감탄한다. 하지만 이제 어쩌랴. 그 10전의 정확도 자랑 때문에 “집을 짓는다더니 양어장 만들 생각이요?”라는 마을사람들의 뼈 있는 농담을 듣게 되었으니. 첫 단추부터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그 단추가 집 전체의 모양을 바꿔버리는 카오스의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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