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N에게 화폭이 생겼다. 꿈이란 그림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그릴 화폭이 생긴 것이다. 그에게 있어선 이 학고개에 세워질 집도 목표물이 아니라 그곳에서 펼쳐질 이야기의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이 일으키는 흐름. 그것은 또 하나의 꿈이다. 하지만 어쩐다. 그에겐 집 설계는커녕 그 비슷한 경험도 전혀 없었으니. 믿을 만한 몇 곳 찾아다니며 주변에 어울리는 멋진 집 설계를 받아보지만, 어쩐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그들이 제아무리 집 그리기 전문가라도 그 땅모양과 주변경관을 N보다 더 잘 알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런 괴리는 당연한 것 아닌가. 이번에는 설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배운다는 마음으로 의논을 곁들여 집 모양을 같이 그려나가기를 시도해보지만 오십보백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집 짓는 비용. 이것 또한 문제다. 건축비라는 것이, 종이에 그려지는 사각형모음이란 이차원적 면적에 평당 얼마, 그렇게 단순한 곱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사각형들에 삼차원적 멋을 곁들이면 일정 배수가 또 곱해지고, 또 주인의 개성을 살려 여기저기 꼬부리면 또 다른 어떤 숫자가 거기에 곱해지는 그런 고등수학이다. 마음에 드는 집을 지으려면 적어도 졸부수준의 배포는 있어야한다. 그렇다고 통장에 박혀있는 숫자에 맞추다보면, 이번엔 개성 없는 자연파괴 세리머니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 딜레마를 벗어날 무슨 방법이 없을까? 문제의 근원은 간단하다. 건축업자에게 일을 통째로 맡기는 한 이 딜레마는 벗어날 수가 없다. 구걸하듯 부탁해 설계도 받아와서, 이번엔 또 그 설계도면을 시공업자에게 맡기고 구경만 하다, 나중에 다 되었습니다하고 건네주는 열쇠나 받아드는 그런 시스템.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다. 망설이기보다는, 과감하게 발 벗고 직접 그 모든 것을 해내는 것. 이것이 N이 얻은 답이다. ‘손수 설계하고 손수 집짓기’
이제 N의 발걸음이 사방으로 바빠지기 시작한다. 인터넷 뒤져가며 흙담집도 찾아가고, 귀틀집에서 묵어도 보느라 주말이 주중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다. 집짓기학교라는 곳도 알아보다가, 깜짝 놀란다. 연소자 입장불가가 아니라 ‘연로자 입학불가’의 원칙이 철저하다. 사고의 위험성 때문이란다. 그 장난 같은 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이 나이에 손수 집을 지을 수는 있을까. 막연한 불안감이 N을 엄습한다.
생각이 정리되며, 윤곽이 잡힌다. 시간에 쫓길 필요 없이 여유 있게 지을 수 있는 집은 오직 귀틀집. 집짓고 난 다음 아차 싶어 고칠 필요가 있을 때 그 어려움이 가장 덜한 것도 역시 귀틀집. 또 무엇보다도 노송들이 내려다보는 이곳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모양의 집으로도 역시 귀틀집. 이제 싫든 좋든 직접설계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귀틀집 같은 값싼 집을 설계해줄 사람도 없고, 또 귀틀집설계 경험이 있는 설계사무소도 있을 리 없기에.
보통의 설계라면 사각형부터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다르다. 이곳이 어딘가. 신성한 기가 깃들어져 있다고 ‘바탕말림’이라고 불리는, 온 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또 마을사람들이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그 수령 백년이 넘는 소나무 수십 그루가 모여 있는, 길옆 밭 한 가운데 아닌가. 더구나 주말마다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바로 그곳에 아무리 강심장인 사람이라 해도 흉물스런 구조물을 집이랍시고 세워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다른 무슨 핑계가 필요하겠는가. 동화나라에 흉물을 올려놓은 모습을 제일 참지 못할 사람은 바로 N 그자신이니까. 학교 때도 또 그 이후 어느 때에도 가까이 해본 적 없는 입체적 그림그리기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옷의 모양을 만드는데 절대적 등급이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 입히느냐에 따라 그 옷의 가치가 정해지듯, 집짓기 역시 그 집의 자체의 사진만으로 그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이 주변과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진다. 이런 설계 작업은 절대가치 지향적 성격의 과정을 수반한다. N의 이 이단적 입양아가 꿈의 조건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N이 그 입양을 고집하는 것은 바로 그 집이 귀틀집이고, 귀틀집의 가치는 호화로움이나 크기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박함과 순박함에 의해 정해진다는 매력에 끌려서이다.
귀틀집. 예전에 화전민들이 다음 장소로 이전하기 전에 임시로 살 집을 짓던 방법이다. 주변에 널려있는 나무를 우물井자로 쌓아올리고, 그 빈틈을 역시 주변에서 구한 흙으로 채운 그런 집이다. 그런 배경에서 귀틀집은 기본적으로 한시적 용도를 위한 것이다. 내구성은 중요한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N의 집은 다르다. 또 하나 있다. 화전민들의 집이야, 문자 그대로 산속에 있는 집이니, 주위의 평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N의 집은 바로 길가에 있는데, 어찌 그 모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값싼 재료로 소박하게 짓는 집이라 하지만 N의 집은 그런 의미 보다는 스스로 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받은 집이다. 소박함이 초라함으로 전락할 그 정도로의 궁색함은 면하고 싶다. 비록 그렇게 하는데 비용이 조금 더 든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또 그려봐도 한계를 벗어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목수가 아니라도 귀틀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여기엔 기둥세우기가 필요 없다는 이유 때문인데, 기둥이 없는 집이라는 바로 이 점이 말썽이다. 성냥가치를 우물井자로 쌓아놓는다는 그 기본생각은 좋다. 하지만 문을 하나 만들면 거기엔 ㄷ자만 남고, 이번엔 창문 하나 더 트면 거기엔 ㄴ자 모양만 남고, 아예 벽마다 창문이 하나씩 들어서면 남는 것은 十자 모양이 된다. 그런 모양에선 기둥역할은커녕 홀로 서 있기도 힘들게 된다. 화전민처럼 집이 무너지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그런 집이라면 몰라도 오래오래 버텨야하는 N의 집으로는 적당치 않다.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인터넷 뒤져가며 사진들은 들여다보고, 유명하다는 펜션단지 찾아가서 요리조리 살펴도, 해결책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각형 모양을 육각형으로 확장하는 난센스를 자랑이라 떠벌리고, 또 어느 곳에선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장을 합판으로 눈가림하고 손님을 받기까지 한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N은 기둥井자 귀틀집이라는 아주 융통성 있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전통적 귀틀집’에서는 생각도 못할 벽 모양과 인테리어 장식을 built-in 형태로 심어 넣을 수 있는 아주 경제적 방법을. N은 ‘낭만의 집’을 수없이 그려보고 또 그려본다. 이 ‘발명품’이 그것으로 끝나는 매듭이 아니라, 낭만이라는 다음 흐름의 바탕이 되기에 N의 ‘꿈은 흐름이다’라는 주장에 맞는 것이고, 또 이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호화주택’을 지울 수 있기에, 이 집짓기가 N의 꿈 식구에 입양될 수 있는 적법성도 확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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