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컨테이너 박스 문 앞에 앉아 하늘 한번 양어장 한번 쳐다보며 한숨짓는 N에게 C사장이 다가온다.
“형 소문 듣고 찾아왔수. 손가락도 부러졌다면서요.”
이곳 마을에선 모든 것이 리얼타임으로 전파된다. 양어장 깊이도 다 알려져 있는 데, 설익은 솜씨로 말뚝 박다가 엄지손가락 뼈가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어디 묻혀있겠나. N에겐 부끄러움보다 반가움이 앞선다. 땅을 마련하고, 여기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던 작년 초, 서로 인사를 나누다 호형호제하기로 한 후, 허물없이 지내게 된 사이다.
“아이구 형. 그 알량한 집하나 짓다가 사람 죽겠수. 형. 내가 집을 지어드리리다.”
N은 이미 그가 지은 집 몇 채를 본 적도 있고, 또 그 집들이 평당 얼마짜리인지도 알기에 웃으며 사양한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내 이러고 있겠나. 하여튼 호의는 고마워.”
“여유 좋아하시네. 그런 건 걱정마시우. 인건비랑 자재비 다 형이 직접계산하고, 집짓는 데 필요한 폼도 다 내 창고에서 갖다 써요. 필요하면 내 짐차도 부담 없이 쓰고. 집짓는 게 뭐 애들 장난인줄 아슈? 내 며칠 있다 야리가다 매러 올 테니 도면이나 준비해둬요.”
“야리가다는 또 뭐꼬.”
“아이구. 형은 그런 건 몰라도 되요. 하여튼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요. 형은 구상, 나는 세운다. 이렇게 말유.”
웃음을 던지며 돌아가는 C의 모습을 보는 N의 머릿속은 아직도 텅 비어있다. 이미 귀틀집 지을 나무는 다 주문해 놓은 상태. 여유 있게 기초를 닦다가, 장마가 오면 그때 그 나무들 물에 흠뻑 젖게 한 후, 가을 내내 나무껍질 벗기고, 내년에 얼음 풀릴 때, 진흙 개어 붙이며.....
이제 첫 단추 잘못 끼워져 양어장 바닥이 생겼으니, 여기에 귀틀집 올리면 영락없는 콩나물 움막이 되고 ......
아이구 그 귀틀집이 보통집이야.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지어지는 겹벽 귀틀집인데.... 내 그 수많은 벽화구상은 어쩌구.....
그 포클레인 기사 멋쩍어 사라진지 이미 오랜 마을회관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된다. 그 양어장 일에 생각보다 많은 돈을 받아간 것과 또 방세도 안 내고 사라진 것 등 사소한 섭섭함까지 한꺼번에 겹쳐온다.
전화위복? 새로운 환경? 집착? 그래! 원래는 그럴 듯한 집을 지으려다 이것도 힘들고, 저것도 어려워 차선의 타협책으로 생각한 것이 귀틀집 아니던가. 사실 귀틀집이야 신기한 마음에 며칠 묵기에는 좋지만, 계속 사는 살림집으로는 불편하다는 것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여우가 포도가 시어서 안 먹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N도 들은 적 있는 모양이다. 사실 단층집보다야 이층집이 더 낫고, 모양의 운치도 더 살릴 수 있지. 그의 생각은 계속된다. 이러면 어떨까. 길에서 보면 반 지하의 집이지만, 계곡 쪽으로는 시원하게 트인 아래층을 만들고, 그 위에 귀틀집을 올리는 거 말이야. 마치 청바지에 저고리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우선은 그저 이층집을 만들기 위한 통기초를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아래층을 만들고, 이층은 나중에 생각하지 뭐.
그 나비 날개 짓 한 번에 옆 코스로 밀려난 형국이다. 좋다. 어쩌랴. 새로운 출발이다. N은 그 변화된 상황에 맞게 큰 틀의 방향을 새로 정하고, 새 그림을 시도해본다. 하지만, 어쩌랴. N이 그동안 묵으며, 뜯어보며, 뭔가 배우고 알아내려 살펴보았던 집도 다 올망졸망 펜션뿐이었고, 인터넷 들어가 여기저기 훑어보아도 마음에 드는 모양을 찾아내기 힘들다. 動線도 어지럽고, 조명 환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질 않는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내가 아무 집이라도 무조건 지어야 하다는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적어도 내가 살 집이라는 가치가 있으려면 아파트와는 달라야 한다. 펜션과는 더더욱 달라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나무 숲 경관을 해치는 모양이 되면 우선 내 마음부터라도 편하지 못할 테니 요란함은 금물이다.
뭐 그렇게 뜸 들일 필요 없지 않은가. 이제 보통집을 그리면 되니, 오히려 그 제약 많은 귀틀집보다야 상황이 훨씬 더 단순화된 것 아닌가. 우선 원칙을 정하자. 시원시원한 공간을 만들자. 거실, 침실, 부엌, 욕실. 이렇게 하나씩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서재나 손님방은 이 필요하다면 그건 이층이나 별채에 만들면 되고.
큼직큼직한 사각형 몇 개 그려지고 일층 설계를 끝냈다. 이층 모양이 어떻게 될지 지붕 모양이 어떻게 될지. 그런 어려운 일은 우선 접어두자. 미루자. 이런 식의 억지 합리화가 마음에 썩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새로운 건축법을 피해보려면 어쨌든 기초공사에 들어갔다는 확인은 받아야한다. 공연히 어물어물 늦추다가 시간 놓치고, 바뀐 법에 따라 건축 사무소에서 만든 확정 설계도를 제출하고 나중에 거기에 따른 준공검사를 받아야하는 그런 꽉 막힌 진행을 강요당한다면 그거야말로 불행 아닌가.
어쨌든 C가 Y를 대동하고 다시 현장에 나타났을 때 N은 굵직굵직한 선으로 스케치한 일층 설계도를 그들 손에 넘겨줄 수 있었다. 이층 설계도 없이 일층을 지어보기는 C도 Y도 처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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