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개솔숲 이야기

c-7 경기병 서곡

뚝틀이 2009. 1. 18. 16:53

죽어가던 웅덩이에서 기운이 다시 솟아난다. 그동안 시간이 제법 흘렀던 탓에 웅덩이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려 다시 포클레인을 부른다. N은 옳다 이때다 하고, 계곡으로부터 올라오는 바람의 방향을 고려하여 집 방향을 약간 동쪽으로 틀기로 한다. 설계도는 그대로 유효한데 기준선의 방향만 동쪽으로 약간 트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미세조정이 아주 큰 영향을 주지 않는가. 불안한 노래도 음 높이 약간 올려주면 편안해지듯이. 아하. 높이. 집 높이에도 미세조정을 집어넣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양어장 바닥에 집을 세워서는 그럴 듯한 모양이 나오질 않아, 미련한 방법이긴 하지만, 철근 콘크리트로 바닥 높이를 위로 올리기로 한다.

사람 마음이 다 이런 식인가? N은 아직도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 미련한 방법으로라도 높이를 올리기로 했으면 원래구상인 귀틀집으로 이제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더구나 C가 구상은 N의 것이고 구현은 자기 몫이라고까지 이야기 했으니. N은 애써 그런 것까지엔 생각이 못 미쳤다는 척하며 수정된 설계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간다. 이것이 사람이다. 한번 편안해질 기회를 잡으면 어려운 길로 다시 내려서지 않는 것.

 

아마추어는 옆으로 비켜서고, 프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같은 포클레인 작업이라도 프로들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그 작업분위기가 달라진다. 역시 프로는 프로가 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프로건 아마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니 뭔가 되어가는 것 같다. Y는 쉴 사이 없이 무엇인가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잡고, Z는 마치 서부영화의 말 없는 건맨처럼 접근불가를 신호하고, X는 자신의 일을 음미하듯 몸짓조차 우아하게 움직이며 위엄을 더한다. 망치소리, 기계소리에, D야 G야 불러대는 소리 어지럽게 섞여들고, 뜻 모를 일본 토막말과 담배꽁초는 방향 없이 날아다닌다.

일단의 다른 무리가 작업장을 점령하더니 굵은 철근 가는 철근 이리 묶고 저리 묶으며 움직여나가는데, 또 다른 무리 뛰어들어 흑황적녹 플라스틱 호스를 여기에 끼워 넣고 PVC관을 저기에 묻는다. 레미콘 차 분주히 들랑거리며 시멘트와 돌 섞인 물을 펌프 카에 먹여주고, 땡볕에 우주복 입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반죽 받아 거품 빼며 다진다. Y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널빤지로 막기놀이 하고, 날카로운 독수리눈 C의 입에선 거친 소리 불 뿜는다. 어느덧 육중한 돌바둑판 양어장 웅덩이 가득 채운다.

 

바닥이 굳고 얼마 지난 후, 다시 사람들이, 레미콘과 펌프 카가 경기병 서곡 울리며 기둥과 벽체를 바둑판위에 고정시키고, 또 그 기둥과 벽체가 굳은 얼마 후 다시 서곡이 울리며 슬라브와 거실 윗벽 채워 넣는다. 뻥 뚫린 거실 천장부만 빼고는 사방이 거푸집과 폼으로 막혀 어두워진다. 인간의 쉼터는 어두운 공간이다. N이 깨닫는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밝은 세상의 한곳에 어두운 공간을 심어 넣는 것이다.

종이에 가볍게 그린 선 하나라도 결국 이렇게 육중한 돌쇠덩어리 모양으로 굳어지는 것을 보는 N은 신중과 정교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실감한다. “집짓기가 뭐 장난인줄 아슈.”하던 C의 목소리가 자꾸 그의 귀에서 앵앵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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