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콘 위주의 작업단계가 끝나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법석을 떨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갑자기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요란함 속에서는 개인이 전체에 묻혀버리지만, 차분함 속에서는 개별악기의 선율이 들린다. 이제 시인과 농부가 경기병을 몰아낸 형국이 되었고,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집합체가 아닌 D,E,F,G,X라는 개인의 모습이 N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개인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N과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남은 반가운 것이다. 우리 만남의 비극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만남이란 것이다. N은 일자리를 주고 결과를 받고, 그들은 일을 주고. 보수를 받고.
물론 C라는 완충적 존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주 역할은 N의 구상을 실체화시키는 것이고, 일하는 사람들을 독려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사람들을 다뤄야하는 것은 건축주의 몫인데, 이건 N이 겪었던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다.
N의 직업도 사실 근본적으로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었다. 다룬다기보다는 다듬으며 같이 크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N이 겪었던 그 만남에는 하나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
믿음? 여기에선 그런 것이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고, 또 존재해서도 안 될 개념이다. 최인석의 소설에서 펼쳐지던 그 지리산 그림이 지금 이 학고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일당을 받는 사람들이다. 일을 잘해도 못해도 일을 많이 해도 적게 해도 그 일당엔 변함이 없다. 그중 하나가 욕심을 내어 일을 잘하게 되면 비교대상이 되는 그 옆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는 의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구나 그들 중 누가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들 전체의 다음날 일거리를 줄이는 것이니 이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도 일을 하면 할수록 몸에 무리가 오거나 다칠 확률이 더욱 높아지니 어쩌면 당연한 분위기라고 할만도 하다.
더구나 N의 집짓기에는 낭만이라는 독소가 더 들어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사실 이들이 다른 곳에서 익숙하게 해왔던 그런 것과는 다르니, 말썽의 소지가 한 단계 더 높게 심어져있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해본 경험이 없는 일을 부탁하는 것은 금기사항에 가깝다. 무엇 때문에 골치 아픈 일에 손을 대고, 익숙하지 못한 일로 자신의 실력이 드러내야 하겠는가. 좀 더 생각해보자는 말로, 이런저런 핑계로 시간을 끌며, 결국 그들이 원하는 편한 쪽으로 유도하려 애쓰는 동안, 건축주의 애간장은 타들어간다.
어느덧, 구상했던 대로, 거실 천장에 육중한 대들보 두 개가 걸린다. 깎아내고 다듬으며 그 대들보 모양을 만드는데도 한 주일이나 걸렸던 커다란 덩치고, 크레인으로 이 덩치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상량식. 대들보 걸리는 날은 인부들의 잔칫날이다. 보통 대들보엔 龍자와 龜자 크게 쓰고 그 두 글자 사이에 기원문과 날짜를 쓰지만, N은 이런 것을 생략한다. 그냥 깨끗한 천장 디자인이 그런 글자보다 더 좋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상량식이 시작된다. 사회를 보는 이가 ‘오늘 주인이 여러 번 절을 해야 할 것이라’ 미리 선포하는데, 순진한 N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충분한 액수를 미리 넣어둔 봉투를 돼지 머리에 꽂고 여러 차례 고래 숙여 절을 올린다. 사회자가 또 다시 절을 하라 요구할 때, 그때가 되어서야, 여러 번 돈을 꽂으라는 이야기란 걸 알아차린다. 솔직한 것이 최고지. N이 답한다. ‘저 봉투에 여러분 섭섭지 않을 만큼 넣었으니 안심하세요.’
이어서 사회자가 마을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며 절을 올리게 하는데, N의 속이 울컥 뒤집힌다. ‘이건 민폐다. 내 오늘 기쁜 날이라 저들을 모셔왔는데, 저들의 주머니에 부담만 주는 결과가 되었구나.’
물론 어떤 일에 대해 금전적으로만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는 하다. 만나는 사람이 다 똑같은 것도 아니고, 같은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고 어떤 성격으로 만났는가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의 이 만남은 인부들과 ‘그 이외’의 사람들의 만남이다.
만남의 성격에 따라 평가가 결정된다면, 이 집짓기에서의 만남은 이미 애초부터 객관적일 수가 없다. N이 입장을 바꿔, 그들의 눈에 비친,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신이라는 존재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저 사람 한평생 편하게 살다가 이제 편히 쉬러 이곳에 오겠다 그거지.’ 그렇다면 어차피 처음부터 호감을 가질 수 없도록 되어있는 관계설정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N이 그들 중에 하나였더라도, 외지에서 침입한 도시인을 보는 눈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N이 그 외지인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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