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만화가 있었다. 돋보기로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마을 분위기도 알아내고 간첩도 잡아낸다는 그런 만화가.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저자가 내미는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그곳의 주변 강대국과의 역학관계와 지정학적 의미 또 그 나라들이 처해있는 현실과 앞으로의 전망이란 음악이 생생하게 들려나온다. 이렇게 시원하도록 깊이 있는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슨 조사 분석 내용을 담은 딱딱한 보고서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문체와 비유법 또 그 표현방법 자체가 때로는 아주 문학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세련되어,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 마치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그냥 그 그림이라는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그 그림에 담긴 철학과 작가가 의도한 그 무엇인가를 아주 열정적으로 대변해주는 그런 훌륭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안내를 받으며 그 진실된 배경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그런 값진 경험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저자 파라그 카나의‘한 나라를 완전히 파악하기 전에는 다른 나라로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제2세계는 원래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국가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말을‘부유하고 안정되어 현재 세계질서의 이익을 보고 있는’제1세계와‘가난하고 불안정한’제3세계의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그런 나라들을 총칭하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거기에 속하는 나라들, 즉 구 동구권, 중앙아시아, 동남아, 중남미,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로 짚어나간다. 자칫하면 무미건조하게 사전식 나열에 그칠 수 있는 내용을 저자는 ‘큰 틀 속에서의 각 나라의 존재가치’를 논하는 형태로 깊이 있게 다루어나간다. 그가 말하는 큰 틀이란, 막무가내 미국이 독주하던 그런 세계는 이미 막을 내렸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전파하는 대체세력 EU, 또 역사를 갖추고 실용적 파워를 구사할 줄 아는 막강경제 중국의 등장으로, 세계는 앞으로 3두체제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제2세계 국가들은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기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 경제/정치/군사적 선택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도 정해지고, 또 지역의 세력판도가 변해나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저자는 각 나라라는 ‘상품 그 자체’를 평가하고, 그 선택에 따른 ‘상품가치’를 메기는 그런 방식으로 나라 품평회를 진행해 나간다. 따라서 각 나라에 대한 설명은 독립적이 아니고 서로 연관된 그런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또 그루지야의 실크로드 시대와 앞으로의 시대에 갖는 가치, 이란과 이라크 또 사우디아라비아 뿐 아니라 요르단 시리아 두바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의 한 때 허황된 꿈이 빚어낸 비극, 알제리 모로코 이집트의 대한 역사적 진실 등, 그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국과 EU 또 중국의 피 말리는 작전들,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우리와도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일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가 저 밖 세상 이야기에 대한 특별 강의를 받았다고나 할까. 절대로 한 번 읽고 그냥 옆으로 젖혀 놓아둘 그런 책이 아니다. 서가에 꽂아놓고 언제든지 필요부분만 골라내어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귀중품이다.
물론 어떤 책이든지 옥에 티라고나 할까 눈에 거슬리는 면이 있는 법.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문자 그대로 옥에 티일 뿐이다. 책 자체는 옥이고 그 티가 옥을 돌로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의 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영국에서 연구하고 있는 그는 세계질서는 당연히 서구인들의 표준에 맞추어져야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정도가 지나친 일방적 생각이 곳곳에 드러난다. 예를 들어, 러시아 코밑의 나라들까지 유럽연합이 돌보아야한다는 그의 주장을 입장을 바꿔 러시아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또 미국이 원하는 질서체제에 어깃장을 놓는 중국이 과연 음흉해서 그럴까?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균형 잡힌 분석이고, 현실을 보는 눈 또한 매우 객관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 반도의 남쪽이 작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이 10만km2는 너무 답답하게 작게 느껴진다. 하도 이것을 의식해서 인지 중국에 한반도면적을 더하면 그것이 미국 면적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이런‘장난감’같은 나라를 지금과 같은 속 좁은 갈등이 망치고 있다니. 북한에 관한 언급이 마음에 걸린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중국파워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그 중국이 그렇게 원대한 전략아래 그렇게 희생을 무릅쓰고 확보한 북한인데, 어떻게 간단히 미국의 영향권 아래로 놓이도록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정말 최상의 시나리오라는 것이 결국 ‘아시아의 핀란드’정도의 북한이란 말인가.
'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경숙의 '외딴방' (0) | 2009.02.06 |
---|---|
Khaled Hosseini의 'The Kite Runner' (0) | 2009.02.04 |
한승원의 '키조개' (0) | 2009.01.29 |
알리 아크바르의 '세상은 나를 울게 하고 나는 세상을 웃게 한다' (0) | 2009.01.29 |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0) | 2009.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