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별로 구분해 다이제스트 형태로 엮어낸 ‘맛보기 성격’의 러시아 ‘역사 소개서’이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줄거리만 겨우 요약해놓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고 나서 마치 그 대서사시 자체를 다 읽은 것처럼 흐뭇함을 느끼는 그런 착각이라고나 할까. 그 민초들이 ‘민족적 후진성’이라는 멍에에 겪어야만했던 ‘운명적 고통’, 어지럽게 반복되는 ‘격동’과 ‘후유증’, 또 그 사이사이 예술로 승화된 싹을 틔웠던 ‘민족문화’... 더구나 이 러시아야말로 ‘그 어떤 나라’가 아니라 지금도 세계사의 한 축을 이루는 ‘실제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실제적 강국’ 아닌가. (나라의 힘이 꼭 경제지표상의 숫자만은 아니지 않은가.)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그쪽’에 대해 피상적이나마 어느 정도 ‘연결된 그림’을 얻을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다.
‘열등한 민족’이란 무엇인가. ‘전체’를 들먹이지만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 존재’들에게 있어서 ‘우리’란 개념의 한계는 어디였을까. ‘누리는 자’와 ‘누리려 애쓰는 자’들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자’들 위에서 꾸려가는 그 세계. 지옥과 연옥 속의 인간군상. 희망과 신기루. 본질과 환상. 작용과 반작용. 관성의 힘. 뒤집히는 듯 다시 제자리, 그리고 또 다시 뒤집히는 듯.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바로 이 ‘불변의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사회주의를 미화시키려는 ‘필요성’에 따른 측면도 있었겠지만,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현상은 떠 또렷하게 나타나고..... 때로는 ‘죄와 벌’의 그 독 품은 주인공이, 때로는 ‘닥터 지바고’에서의 검은 외투 속 안경잡이가, 때로는 ‘1812년 서곡’ 끝부분을 가득 채우는 대포소리가 머릿속을 채운다.(사실 이런 다이제스트 성격의 편집에서는 그런 연상적 그림을 심어 넣으며 스토리 전개에 생동감을 실어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을 텐데....)
세 차례에 걸친 그곳 방문. 몸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걷고 또 걸으며 ‘모험’까지 겪었던 모스크바. 뻬쩨르부르크를 거쳐 지금은 자유를 만끽하는 에스토니아와 폴란드를 지나가던 그 환상 같기만 했던 여행. 크라스노야르스크와 이루크츠크를 거쳐 몽골을 향하던 ‘세모꼴’ 여행. 지금도 책꽂이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저 러시아어 책, 사전, 그리고 CD뭉치. 그래서 그런지 더욱 이 민족 이 나라가 ‘슬픈 존재’로 내게 다가온다.
또 이건 웬 일일까. 스케일을 달리한 ‘모형도’의 그림이 자꾸 오버랩 되며 ‘슬픈 느낌’이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목적의식을 가진 전체’를 꾸리며 ‘조직적 움직임’을 일으킨다면 경제부흥(적어도 통계수치상)은 아주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경험한 적이 있고, 혁명이라는 그 단어의 참뜻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바른 길’로 들어서보려는 시도도 여러 번 있었지만, 얼마나 번번이 그 ‘공동체적 운명’이라는 상위개념이 옹졸한 ‘비교우위의 자기 것 지키기’라는 하위개념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곤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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