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초록이 흔들린다. 향기가 부르르 떤다. 밤나무 숲에 덮쳐드는 흰 연기 검은 연기에 제비 나비 놀래고, 부르르 떨림에 들꽃도 아이도 어리둥절 고개를 하늘로 향한다. 큰 짐 작은 보따리 마당으로 쏟아져 나오고, 수레가 어지러이 오가며 마을을 싣는다. 제비 나비 대신 겁에 질린 어른들이 자욱한 먼지 길 따라 아이 손을 이끈다.
차가운 별빛과 숨 막히는 더위가, 험한 숲과 차가운 물길이, 소곤소곤 타이름과 다급한 외침이, 삶과 죽음이, 끊어질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끊어진다. 초록과 향기를 떠나온 이들의 한숨과 탄식소리 속에서 아이는 검은 연기 가운데서 붉은 머리 치켜들며 춤추는 용에 놀라고 깊은 우물 물속에서의 차가움에 놀란다. 넓은 방바닥을 가득 메워 쪼그려 앉아 떨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한 아이는 교각 밑으로도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토굴 속으로도 마른 먼지가 덮침을 느낀다.
철조망 안쪽 기다랗고 둥근 집들 사이론 희고 까만 사람들의 굵고 날카로운 소리가 구두소리로 분주히 이어지고, 석탄가루 뒤집어쓴 기차들은 연신 가쁜 숨을 뱉어낸다. 황량한 벌판에서 돌과 흙이 갈리며 감자뿌리가 자리 잡고, 볏짚과 진흙이 어울리고 콜타르 범벅이 그 위를 가리며 먼지와 그을음을 아우르는 모자이크가 태어난다.
어디선가부터 사이렌 요란하게 울려대고 귀청을 찢는 소리가 하늘을 건너지를 땐 차라리 그 교각 밑 그 토굴 속 그때를 그리워하며 겁에 질린 어른들을 뒤로하고 튀어나온 아이는 골목길 사이 하늘의 검은 유령을 가리키며 환호한다.
어디선가부터 사이렌 요란하게 울려대고 귀청을 찢는 소리가 하늘을 건너지를 땐 차라리 그 교각 밑 그 토굴 속 그때를 그리워하며 겁에 질린 어른들을 뒤로하고 튀어나온 아이는 골목길 사이 하늘의 검은 유령을 가리키며 환호한다.
진흙 담 옆으로 살며시 고개 내민 볏짚이 파르르 떨며 기차가 떠남을 알리면, 아이는 쏜살같이 튀어 나간다. 콰르릉 쿵쿵 어른보다 훨씬 더 큰, 눈부시게 반짝이는, 쇳덩이 바퀴가 지나간 철길. 아이는 이곳저곳 두리번거린다. 들여다본다. 집어 든다. 환호한다. 통통한 녹 때 옷 벗어낸 납작 못들이 예쁜 칼 찌그러진 창되어 아이 손끝 실끈에 매달려 노래를 한다. 이쪽이 대롱대롱 남쪽이고 저쪽이 달랑달랑 북쪽이라.
아이는 걷는다. 철길 따라 걷는다. 이리 툭 저리 탁 아이의 발길에 차여나가는 자갈사이로 신비롭게 하얀 차돌이 환히 웃으며 얼굴을 내민다. 아이의 주머니에 신비한 보석이 가득 찰 때면, 먼 산 하얀 구름이 붉은 깃털 펼치며 능선을 불러내고, 창과 칼은 실 끝에서 다시 노래 부른다. 여기엔 할미꽃 저기엔 민들레.
까만 슬픔이 모자이크 마을에 내려앉으면, 옥토끼 할 말 찾아 머뭇거리다 계수나무 뒤쪽으로 고개 돌린다. 호롱불 석유심지 하늘하늘 되살아나고, 유리 속 버들치 몸부림치며 새까만 그을음 밖으로 나오려할 때, 피곤한 어른들 눈을 붙이면, 여기 반짝 저기 반짝 하늘 별들이 안절부절 아이들을 밖으로 불러낸다. 하얀 보석 꺼내들어 부딪치고 튕기면서 별빛 만들면, 저 칠흑 하늘 위에서 소 끌던 총각이랑 베 짜던 아가씨도 궁금증을 못 이겨 땅위로 내려온다. 터지고 긁힌 아이들 손 사이로 조용한 노랫소리 흘러나간다. 이것은 내별이고 저것은 네별이라.
병아리 솜털 벗듯 아이가 커가며, 자갈소리 철길 떠나 발 닿는 곳 넓어진다. 조심조심 뚝 길을 내려선 아이를 탁 트인 내가 반긴다. 힘세고 잽싼 메기가 반긴다, 사로잡는다. 오랜 세월 임금님 모시며 졸고 있던 돌 할아버지가 흙 메뚜기 따라 도마뱀 따라 다가오는 아이를 반긴다. 예고 없이 찾아온 아이에 놀라 갑자기 푸드득 꿩이 날아오른다.
진달래랑 개나리 입속에 넣고 오물거리다, 모래흙에 미끄러지며 큰 바위에 오른다.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마을 그곳 친구들 생각하며 네 활개 활짝 펴고 하늘 향해 눕는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따스한 햇살 자장가에 사르르 잠든 아이는 꿈속에서 건너 마을 왕자가 된다. 그 아이들 것보다 더 반짝이는 자전거에 올라 그 동네 신작로를 씽씽 달린다.
진달래랑 개나리 입속에 넣고 오물거리다, 모래흙에 미끄러지며 큰 바위에 오른다.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마을 그곳 친구들 생각하며 네 활개 활짝 펴고 하늘 향해 눕는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따스한 햇살 자장가에 사르르 잠든 아이는 꿈속에서 건너 마을 왕자가 된다. 그 아이들 것보다 더 반짝이는 자전거에 올라 그 동네 신작로를 씽씽 달린다.
아이의 가슴이 콩콩거린다. 세상에 이런 일이. 책에도 색깔이 있다니. 빨간 동그라미를 사이사이에 품은 검은 띠 뱀이 구불거리고, 물오른 버들가지 초록색 뿌리를 파랗게 내린다. 감자랑 고구마에도 까만 삼각형이 박혀있고, 파란 것보다 더 진한 파랑이 여기저기 고여 있다. 소년의 발은 키보다 빨리 자라고, 머리는 목소리보다 빨리 굵어진다. 동그란 세모차돌 만지작거리며 끝없이 뻗어나가는 자갈소리 듣는다. 아이는 동그라미의 주인공으로, 세모 속의 마술사로 날아오른다.
뒤로는 높은 산 앞으로는 잔디밭 거느린 네모난 건물이 죽죽 들어선 배움터에 발 디딘 아이 머리는 온통 그 동그라미와 삼각형뿐. 틈만 나면 얼룩 띠 따라 자갈길에 올라선다. 먼지 냄새 바뀌면 소리표정 달라지고, 바람개비 바뀔 때마다 소나무향 달라진다. 아이는 그 소리 그 표정 그 향기에 흠뻑 빠져든다. 다른 세상 사람들, 다른 부류사람들.
빨간 바탕 흰 십자 날개가 펼쳐진 밑으로 지그재그 큰 공이 반 바퀴 돌아간다. 푸른 산에 튕겨지는 자갈소리 벗 삼아 파란 호수 위를 미끄러지며 심술 가득한 여신들이 오가던 삼각형 안간힘 쓰던 검투사들이 사라져가던 동그라미 속을 찾는다. 색 바래고 무뎌진 폐허 사이 고양이 어슬렁거림, 칙칙한 네모 속 벽에 걸린 그 통통한 그 벌거숭이들의 숨소리, 다섯줄 꼬리방울에 맞춰 춤추는 그 손놀림.
갑자기 아이의 머릿속 별꽃들이 튕긴다. 어지럽다. 멍하다. 고통스럽다. 짙게 드리운 가로수 그늘아래에서 차돌보다 더 반짝이는 유리창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 아이를 후려친다. 내려친다. 쓰러뜨린다. 배고픔. 아이의 배고픔이 아닌 반섬 배고픔을. 반만년? 돈키호테의 창끝에 걸려 창백한 유리날개에 실려 아이는 다시 잔디밭 네모로 되돌아온다.
거울에 부딪치는 멍함 속에서 아이는 그림이 글자로 글자가 숫자로 변해가는 모습을 본다. 진짜 차돌을 찾아 진짜 별빛을 가득 채운 진짜 보석 잔을 찾아 아이는 결국 다시 그 창백한 날개에 오른다. 땅속 뜨거운 물 그득한 그곳으로 향한다. 꿈이 거울에 부딪치면서 아이의 손수건은 붉게 또 붉게 물든다. 아이는 자갈소리 따라 그리던 그 그림들을 말러와 뒤렌마트의 옷자락으로 덮는다.
예쁜 장미 세 송이 마음에 담고 아이는 옛 동그라미 속 네모로 돌아온다. 한 송이는 차돌과 별빛이 찾아올 푸른 잔디에, 또 한 송이는 세모난 동그라미가 아닌 자갈소리 밟는 칼과 창에, 그리고 또 한 송이는 네모 잔디 자갈소리에 싹트는 유리 상자에. 아이는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필름이 떨린다. 자꾸 떨린다. 화면이 모자이크처럼 떨어져나간다. 자갈소리 흩어지고, 별빛이 부서진다. 아이는 거울을 본다. 황량한 초원에, 깊고 높은 산에, 정글 속에 버려진 자신의 모습이 아이를 마주보며 씁쓸히 웃는다.
필름이 떨린다. 자꾸 떨린다. 화면이 모자이크처럼 떨어져나간다. 자갈소리 흩어지고, 별빛이 부서진다. 아이는 거울을 본다. 황량한 초원에, 깊고 높은 산에, 정글 속에 버려진 자신의 모습이 아이를 마주보며 씁쓸히 웃는다.
꿈. 아이는 꿈을 품고 살았다. 꿈. 그것은 거울이다. 거울일 뿐이다. 마음의 별빛에 마음의 상처가 곳곳에서 살아난다. 별빛도 차갑고 거울도 차갑다. 꿈의 진실을 알리는 저 여섯 번째의 닭이 운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아이는 떠난다. 다시 그 옛날 세모와 네모와 동그라미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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