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호의 속에 심겨진 실망이란 씨앗

뚝틀이 2010. 1. 28. 20:10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다. 이 난감한 상황에 이웃 그 안면만 있던 젊은이가 다가온다.

무엇인가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냐고. 땀 흘리며 애쓰던 그가 돌아가는 뒷모습에 천사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 추운 겨울 막막함이 공포감으로 변해가는데 도움의 손길이 다가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 은혜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는 그런 표현도 전혀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호의를 베푼다는 것 또 그 호의에 고마워한다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런데, 왜 이런 아름다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이 바래고 서먹서먹한 인간관계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일까.

"이 모든 게 분명 호의로 시작되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이런 한탄을 왜 그렇게도 자주 듣고 자주 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이러니도 아니고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언제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다.

 

어려움 불편함 막막함 그런 것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안에 깔려있는 무력감이요 외로움이다.

호의를 베풀고 호의를 입는다는 것은 그전에는 서로 독립된 존재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제 '가까운 사이'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그 점이 어떤 면에서는 도움 그 자체보다 더 큰 기쁨과 안도감이란 선물을 두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이고.

하지만 불편한 관계의 씨앗은 바로 이 '감정'에서 잉태되고 있으니...

 

사람이란 무엇인가. 생명체다. 동물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어느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자기영역 확보 본능, 이것 역시 사실이다.

거기에 하나 더. 때로는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자존심이란 인간 특유의 강렬한 감정.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느낌, 의식의 한 영역을 점점 더 크게 점령해오고 있는 그 도움 준 사람이라는 존재,

받은 호의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갚아야겠다는 그런 의무감 비슷한 심적 부담, 이런 것들이 유쾌할 리 있겠는가.

그런 압박감과 긴장감이 싸여가면서 새로운 의식이 형성되어간다.

“거동이 불편한 이웃을 도와줘야하는 것 그건 건강한 자의 의무 아니던가. 어려운 이웃 도우는 것 그거야말로 가진 자의 의무고.”

 

그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생각들이 쌓여가며 '독립선언문'의 틀이 잡혀간다.

그의 마음 속 저 깊은 곳에는 자기가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는 불편한 생각이 사라져가며,

자신은 '권리헌장'에 들어있는 항목을 누릴 뿐인 자연인이요 독립적 존재라는 합리화된 생각이 잠재의식을 형성해간다.

 

제로베이스. 생명체에 적용되는 간단한 원리이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오늘의 이 상태'는 당연한 것이고, 이것이 '앞으로의 삶'을 생각할 때 그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내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내 생활영역 사고영역에 영향을 미치려들다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존재는 내가 약자임을 자꾸 돌이켜 생각하게 만드는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인 것을 모르는가?

 

매 학기 장학금을 대주던 사람이 이번학기엔 미안하게 됐다고 전화를 걸어온다면?

어려울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던 그가 이제 더 이상 올 수 없게 되었다고 인사 온다면?

가장 먼저 오는 느낌이 지금까지 그의 도움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지금 갑자기 내 마음의 평온을 깨고 '교란요인'을 제공하고 있는 그가 원망스럽지 않고?

 

易地思之.

“이 모든 게 분명 호의로 시작되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그게 아니다. 천만에. 저쪽의 한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쪽의 질문이다.

“의무와 권리의 방아쇠를 당긴 건 당신인데, 내 권리의식 성장을 따라오지 못하는 당신의 의무감 그거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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