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존재의 다른 이름들
아늑한 여행을 원했었는데, 웬 아이들이 귀찮게..... 잡초
창밖에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왠지..... 들꽃
눈을 맞추고 귀 기울여보니 아이들 모습이..... 야생화
잡초와의 전쟁에 진저리쳤던 지난해 생각에 올해는 일찍부터 칼을 빼어든다.
얼음이 풀릴 즈음부터 바위 쌓인 틈에는 영산홍이랑 회양목이 자라기에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흙만 남겨놓고 싹싹 긁어내고,
냉이 솟을 때쯤부터는 집 근처 샅샅이 훑어가며 칡넝쿨 뿌리들을 철저히 끊고 또 뽑아버린다. 발본색원.
얼마나 철저히 긁어냈는지 흉하게 드러난 맨땅에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좀 심했다 느껴질 정도다.
그래? 몇 번 비에 땅이 촉촉이 적셔지자, 풀들이 고개를 내민다 싶더니 엄청나게 뻗어간다. 그 힘, 그 속도.
이 녀석들이 정말..... 몇 그루 뽑아내는데 뿌리에 매달려 올라오는 흙덩이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아서라, 아서. 잡초 뽑기가 흙 운반공사로 변질되기 전에.
이 풀들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잡초는 그냥 잡초. 제초제 듬뿍 뿌리면 없어지는 그런 것들에 이름 따위를 붙여 구별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런 식이다.
하지만 궁금한 걸 어쩌랴. 인터넷 뒤져볼 수밖에.
그 끊임없이 새로 올라오고 자라나는 잡초들을 카메라에 담아 일일이 대조해가며 이름사냥에 나선다.
내가 공적1호로 지목해 보는 족족 뽑아버렸던 것이 환삼덩굴, 손에 종아리에 긁힌 자국 깊숙이 안기던 녀석들이 며느리밑씻개란다.
또 그 느끼한 녀석들이 닭의장풀과 물봉선이고, 조그만 빈틈에서도 솟아오르는 녀석들은 돼지풀이요 개망초요 달맞이꽃이라나.
이름이 없을 때는 그냥 뭉뚱그려 잡초였지만, 이름을 알아가게 되면서 그들 하나하나가 존재로 변해간다.
존재에는 얼굴이 있고, 잡초의 얼굴은 꽃이다. 끈끈이주걱, 뽀리뱅이, 애기똥풀, 뱀딸기, 붉은서나물, 왕고들빼기, 익모초....
얼마나 정겨운 이름들인가가 서서히 얼마나 귀여운 꽃들인가로 변해간다.
낮에는 사진 찍기, 밤에는 인터넷 뒤지기, ‘우표수집’이 따로 없다. 외우기 또 외우기.
세상에 이런 일이. 외운다는 것을 그렇게 싫어해 전공과 직업까지도 외울 필요가 없는 분야를 택했던 내가 말이다.
산에 오른다. 이젠 건강을 위해서라는 그런 추상적 의미가 아니라 카메라사냥이라는 직접적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뚝갈, 참취, 마타리, 솔체, 잔대, 산도라지, 원추리, 며느리밥풀. 당신 집에서는 잡풀일지 모르지만 여기에선 우리가 주인이요.
렌즈를 통해서야 겨우 들여다볼 수 있는 이삭여뀌 파리풀. 그래 너희가 주인이다.
시동이 걸렸다. 이젠 ‘우표수집’ 위해서라면 거리도 상관없고 시간도 상관없다.
금수산 도락산은 물론이고 치악산 소백산 월악산 오대산 또 함백산으로. 예전엔 그리도 힘들었던 산행이 마냥 즐겁다.
음료수 가득 넣은 배낭을 메고 그 거추장스러운 카메라 도구 손에 들고서도 말이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고 여행이라고?
예전엔 정상이 목표고 거기 도달할 때까지는 극기훈련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중간 중간 길목에서 나를 반기는 이들과의 만남이 바로 즐거움이요 목표다.
투구꽃, 진범, 기린초, 칼잎용담, 괴불주머니, 큰뱀무, 톱풀, 층층이꽃, 미역취. 메뉴는 늘어간다.
지느러미엉겅퀴. 정영엉겅퀴, 고려엉겅퀴, 산비장이, 각시취, 분취, 조뱅이, 수리취, 단풍취, 삽주. 내 목록 속 종류도 불어난다.
벌개미취와 쑥부쟁이와 구절초. 그들을 구별하는 긴 설명이 무슨 소용인가.
빠이원뿌루이지엔. 그냥 보면 저절로 구별되는데.
방아풀과 산박하와 오리방풀, 둥근이질풀과 세잎쥐손이풀? 마찬가지지.
어수리, 궁궁이, 기름나물, 바디나물? 미나리과는 아직 마냥 헛갈리지만 그래도 시간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며느리배꼽, 개여뀌, 도깨비바늘, 사위질빵. 셔터시간 맞추며, 또 조리개 돌리며, 빛의 마술에 그 향연에 빠져든다.
어허! 그동안 내 뭐했지? 꽃은 이렇고 잎은 이렇고 또 줄기는 이렇지 하며 찰칵찰칵 누르느라,
사진이 담는 것은 모양이라기보다는 빛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인가? 잠깐. 자책할 필요가 무에 있나.
그 꽃과 열매들 하나하나에 기쁨과 흥분 또 놀라움과 고통의 이야기가 생생히 담겨있지 않은가. 미적감각은 무슨 얼어죽을...
하지만, 세상살이 언제나 그렇듯이.....
어느 산에서 본 무슨 동호회는 남에 대한 배려란 개념에도 들어있지 않은 무뢰한들의 집단에 다름 아니었고,
또 어느 산에서 본, 꽃 툭툭 꺾고, 담배 휙휙 던져버리던 그 전문가 학자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 보다 훨씬 더 큰 것은 일본식 용어들로 어지러운 야생화 책들에서 느끼는 실망감.
도대체 이쪽 분야 학자들은 그동안 뭣들하고 지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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