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사랑해!” 아이들이 아빠 사랑한단다.
“아빠. 사랑해!” 엄마도 아빠 사랑한단다.
그 사랑에 둘러싸인 아빠는 쓴 웃음만 짓는다. 미안하지만, 아빠 이제 실업자 되었단다, 이 이야기 차마 어찌 꺼내랴.
모임이 있는 날 작은새 때때로 ‘지폐 돌리기’ 놀이를 제안한다. 만 원짜리 한 장 꺼내어 옆 사람에게 주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넘기는 놀이다. 그 받은 사람은 또 다른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이렇게 계속 지폐를 돌리는 게임이다.
무슨 게임이 뭐 이리 싱거워. 처음엔 썰렁하던 분위기, 그 지폐가 돌고 돌며 서로 눈치 보느라 간간히 웃음까지 일으킨다. 그런데 이게 웬일. 처남이 그 지폐를 받자 이 친구 벌떡 일어나며 아싸를 외친다. 사람들의 웃음을 뒤로하고, 헐레벌떡, 켄터키 치킨에 콜라 안고 돌아온다.
작은새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지금 일어난 일을 설명 드릴까요? 방금 내가 철물점 망치랑 톱 사며 돈 드렸잖아요. 아저씬 사과랑 복숭아 사셨고, 과일가게 아줌만 애들 운동화 사주고요. 이렇게 돈이 돌면서 아저씨 아줌마 얼굴이 펴졌죠? 체감경기가 좋아졌다는 말이죠. (제발 그 유식한 재투자니 부가가치 창출과정이니 그런 이야긴 잠깐 접어두자고요. 그냥 재고정리 했다고 치죠 뭐.) 그런데 지금 우리 처남이 그 돈을 켄터키 치킨이랑 콜라에 달아 미국으로 날려 보낸 거예요. 이제 여긴 다시 싸늘한 불경기만 남은 거죠. 참 처남. 이참에 한마디 하자. 자네 그 나이키 신발이랑 마일드세븐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유식한 졸부 아저씨 이때다 나선다. 아니 지금이 어느 시댄데 국산품 타령인가. 그래 우리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란데, 그렇게 깐깐하게 굴다가 무역마찰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려고. 옳거니 옳아 끄떡이는 사람들에게 작은새 고개 숙여 부탁한다. 그렇게 걱정되시면요, 요~앞 은행에 가서 ‘자녀사랑’ 통장 하나씩 만드세요. A회사 B회사 그 돈으로 자금난 벗어나 물건 만들려 원자재 수입하게 되면 아저씨 그 무역마찰 걱정일랑 말끔히 사라질 껄요. 그리고 또, 그런 회사 늘어나 일자리 늘어나면, 그것이 바로 자녀사랑 아니겠어요?
기회만 엿보던 처남이 이때다 끼어든다. 원~참. 이 나이키~ 짝퉁이란 말에요. 적어도 이 운동화 건에선 외국으로 돈 흘러나가지 않은 것 맞죠? 억울하다 이 말씀.
천만에, 그건 더 큰 문제지. 짝퉁이라도 외제라야 한다며 아이들조차 무조건 미제 일제 흉내라도 내야 사잖아.
참, 말 나온 김에 처제에게도 한마디 하자. 작은 새 그동안의 울분을 다 털어놓을 모양이다.
처제가 사준 그 미키 마우스 셔츠랑 클럽 모나코 옷 말이야. 물론 조카아이 기 살려주려는 그 마음 고맙기는 해.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식으로 우리 물건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처제 그 애써 받은 디자인학과 졸업증은 어디 써먹지? 또 처제 그 남친 말이야. 경영학과 출신이라 폼 암만 잡아봐야, 어디 가서 뭘 기획하고 뭘 관리하느냐고. 일자리도 없는데.
에스떼로데르라야 얼굴에 바를 수 있고, 짝퉁이라도 니나리치 손에 들고, 언니는 프라다가 좋겠네. 이런 말들이 내겐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 작은새의 작은 눈엔 어느덧 눈물이 맺힌다.
모욕 느낀 처제가 독하게 쏘아댄다. 형분 밤낮 무슨 고급제품 만들어 승부 걸겠는데, 사실 그거 꿈만 야무진 거 아녜요? 명품이 무슨 물건 말하는 줄 아세요? 상표에요 상표! 주제 파악 하셔야죠. 가격으로 승부하래요. 그것만이 살 길이래요. 우리 남친 얘기예요.
이렇게까지 날 비참하게 짓밟아야하나? 작은 새 속으로 부들부들 떤다.
말 한 번 잘 했다. 근데, 처제랑 언니, 정작 물건 살 땐 어떻게 하지? 생활비 아낀다고 요건 중국제. 실용적이라고 요건 또 일제, 언제 한번 우리 물건에 손 안으로 굽어본 적 있기나 해? 우리나라 회사들 이제 도대체 무엇으로 견디지?
안 되겠다싶었던지 옆집 아줌마 끼어든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네시스랑 또 메모리 뭐라드라 그거 잘 팔린다 하잖아요.
아하! 그래요? 그래 자동차랑 LCD 잘 팔린다고 어디 동사무소에서 그 돈 우리들에게 배급 준답디까? 작은새 울컥울컥 속 꾹꾹 참는다.
백화점 한 번 둘러보시죠. 국산은 어딨죠? 매장 가득 메운 그 외제들 꼭 백화점 그 얄팍한 상혼 때문인가요? 잘 팔리는 물건을 눈에 띄게 놓는 게 그 장사들 잘못인가 말이죠. 길 한번 보세요. 베엠베에 볼보 끌고 다니는 연예인들. 렉서스로 벤츠로 폼 잡는 졸부들. 모였다하면 외제 골프채 이야기 꺼내는 무뇌족들. 다 그 잘났다는 사람들 나라망치기 게임 아닌가요? 아까운 지폐 뭉텅일 바다 너머로 휙휙 던지는 역적들의 모습이 어디 따로 있냔 말이죠.
어찌 그들만 탓하겠어요. 퀵실버 입히는 우리 부모들. TGI 뽀빠이는 아니더라도, 맥도널드에서 요기하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셔야 분위기 있다는 우리 젊은이들. 이 ‘지폐 돌리기’ 게임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내어뿜는 한숨이 들릴까요? 이 땅 꺼지는 소리가요?
아빠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이 따위 입바른 소릴랑 이제 집어치워야죠.
참회하는 마음으로 애들에게 얘기해줘야죠. 아빠 직장 잃은 것도 삼촌 일자리를 못 구하는 것도, 엄마가 너희 신세계/현대/롯데만 찾은 그 때문이라고.
아이들 손잡고 재래시장 한 번 가서, 맥도널든 흉내도 못내는 오징어 튀김, 별별 희한한 옷이랑 신발, 애들 맘에 드는 것 하나 사주며, 얘기해줘야죠.
생일 선물이랑 입학축하 졸업축하 선물로 우리 것 사면, 외국으로 빠져 나갈 돈 그만큼 건진 것이니, 이건 바로 우리들도 수출한 것과 다름없다고.
그리하면 아빠도 다시 직장 구할 수 있으니, 그보다 더 큰 아빠사랑이 어디 있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