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으로 두 달 남짓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매번 이삼일, 길어야 겨우 한주일, 맥주 한잔 편한 마음으로 마시지 못했던, 스쳐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곳. 이번에야말로 마음껏 여유를 즐겨보자. 해야 할 일의 성격도 창의성 최우선이니, 마음의 여유야말로 필수사항 아닌가.
우선 님펜부르크 공원부터 찾는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탓에 거니는 사람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렇게 편한 시간을 가져본 게 언제였던가. 더구나 내 어렸을 적부터 비오는 날을 그리도 좋아하지 않았던가. 함석지붕 때리는 빗소리가 시원스레 시끄러워 좋았고,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물 고인 곳에 빗방울 또 떨어지며 그려내는 동그라미를 쳐다보는 것도 좋았고, 또 무엇보다도 흙탕길 물구덩이 걷어차며 물 튀기기 놀이하는 것이 좋았다.
너무나 깨끗이 가꾸어진 공원이라 그런 낭만은 살아나지 않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머릿속이 맑아진다. 지난 몇 년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제 적어도 한동안만큼은 그 고통으로부터 완전 해방이다. 촉촉이 젖은 꽃과 나무에서, 빗방울이 털어내는 은은한 향기가 내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있다. 촉촉함 속을 걷고 또 걷는다. 한 없이 걷는다.
과장된 행동에 후유증은 당연지사. 마음이 완전히 풀어진 상태에서 비까지 그렇게 맞으며(난 우산을 쓰지 않는다. 초등학교 사학년 때 선생님 말씀. 춥다고 내복 입고, 비 온다고 우산 쓰면, 그 어찌 사나이라 할 수 있으랴. 돌이켜보면 그 말은 전쟁 통의 굶주린 어린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었다.) 온 몸을 적셨으니, 아프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미열이었다. 샤워가 끝나고 약간 어지러운 것 같다싶더니, 자리에 눕자 이내 본격적 몸살기운이 오고, 아침에 일어나려니 이미 몸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갔음을 느낀다. 어차피 주말 아닌가. 편하게 쉬자. 하지만 몸의 열이 후끈후끈 느껴지고, 천장이 빙빙 도는 게 심상치 않다. 그렇다고 구급차를 부를 마음은 없다. 또 그 정도까지 아픈 것이라는 아니라는 생각이고.
사람의 심정이란 것이 참 묘하다. 오랜만에 편히 쉬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아마 사람이 죽어갈 때도 이런 식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때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정도로 아팠다면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렀겠나. 하지만, 반 장난으로 생각했던 몸살이 장난이 아니었다.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며칠을 잃어나지 못했다. 깨어날 때마다 시계를 보면 무엇을 먹어본지도 참 오래 되었구나 생각이 드는데, 배고프지가 않다. 그저 침대에 누워있을 뿐, 앉을 기력도 없다. 이번에는 병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럴 기운이 전혀 없다. 하지만 아직도 구급차를 부를 생각이 없다. 방 청소 오는 아줌마에게 나중에 오라고 이야길 하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나에게도 느껴진다.
생각이 없다. 의욕이 없다. 그 어떤 것도 없는 허와 무의 세계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며칠을 그렇게 지냈다. 살아있는 죽음.
갑자기 손에 힘이 솟는 것 같은 느낌이 온다. 자리에서 일어나도 어지럽질 않다. 머리도 개운하다. 허기가 느껴진다. 밖으로 나와 몇 걸음 걸어본다. 걸을 수 있다. 가까운 곳에 가서 허기라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서 걷는다. 사람들도 차들도 바삐 오간다. 내가 아팠던 것과 이 세상과는 전혀 차이가 없었음을 새삼 느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들어선 곳은 요기할 곳이 아니라 책방이었다. 내 발걸음은 입구 쪽의 화려한 진열대를 그냥 지나친다. 저 안쪽 구석에 꽂혀있는 귀스따브 도레의 그림 성경이 눈에 띈다. 그 두꺼운 책을 오른손으로 번쩍 들어내 왼손에 올려놓고 페이지를 들추는데, 그림 옆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Sagt in allem Dank!가 나온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라. 우리말 성경의 범사에 감사하라 그 구절이다. 생각할 것 없이 값을 치르고 나온다.
난 어렵고 힘들 때 누구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기도도 않는다. 기도를 한다 해도 ‘이 어려움에서 건져주세요.’가 아니라 ‘이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주세요.’ 이것뿐이다. 내 힘으로 이겨야한다.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터득한 생활철학이다. 어려울 때 도움은 마약과 같다. 그것이 반복되면 내 안의 힘이 죽어나간다. 한없는 절망에 빠질 때도, 포기를 할지언정, 도와 달라는 외침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 책을 다시 손에 들고 있는 지금 내 자신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구절이 나를 때린다. 나의 이 행복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바로 그 아픈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회복되며 느끼는 것이니, 아프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행복감이다. 따라서 내 행복감의 원래 뿌리는 회복되기 이전의 아픔 그 자체 아니었던가.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라는 이 구절은 결국 내가 아프기 시작한 그 순간에 이미 감사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고, 설령 몰랐더라도, 아프게 된 그 순간에도 감사의 마음이 있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기복이 없는 삶을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복이란 일시적 후퇴를 내포한다. 원래의 상태에도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감도 몰고 온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쳐서 전진 또 전진만을 외치는 우리사회에선 누적값만이 지고의 가치다. 누적치는 명함에 인쇄되고, 그 명함에 찍힌 글자가 곧 그 사람의 얼굴이다. 그 얼굴 표정 뒤엔 검은 커넥션에 대한 자부심이 서려있고, 그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불안에 떤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사회다. 모르는 사이에 내 생각 거기에 몰입되어 커넥션 그룹에 속하지 못했음만을 한탄해왔다.
이제 내 삶을 새로 평가하련다. 나에겐 지연이 완벽하게 결여됐기에 개척의 기쁨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었고, 내 혈연 또한 어떤 도움도 나에게 줄 수 없었기에, 성취감이란 희열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었고, 내 스스로 되돌려놓은 네거티브 학연이란 페널티 때문에 회복이란 행복감을 그 누구보다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라는 그 페이지는 바로 나를 향한 구절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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